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고.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 ‘신화들 속에서 나무들은 흔히 요정이 변신한 것으로 나온다. 요정들은 신들의 욕정과 탐욕을 피해 육체를 버리고 나무가 된다. 신들은 권력을 가진 자이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한결같이 탐욕스럽다. 그들의 욕망은 도무지 좌절되는 법이 없다. 그들의 절대욕망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변신이다. 탐욕스런 권력자인 신들의 욕망으로부터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요정들은 어쩔 수 없이 나무가 된다. 나무들마다 이루어지지 않은 아프고 슬픈 사랑의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본서 중에서
사랑은 지상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적 배경과
현실이라는 특정한 시간적 배경을 통해 등장한다.
우연히, 그래서 운명적으로 탄생한 사랑이 눕는 요람은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곳, 곧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이다.
영원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난 사랑이 마침내 꽃을 피울 무렵,
그것은 집요한 추격자 시간에 의해 적발되기 마련이다.
추격자의 뒤를 따라 쳐들어온 권력은 사랑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좌절된 사랑의 화신들은 난리 통에서도
끝까지 자기 사랑을 지키기 위해 변신을 선택한다.
그렇게 그들은 야자나무, 소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 등으로 변신한 뒤,
사랑의 완성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는다.
좌절과 상처, 자기 부인과 극복 없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의 본질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다.
일단 시작된 사랑은 완전한 사랑을 향한 여정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완성을 향한 모험에는 숱한 좌절과 상처들이 보장되어 있다.
사랑의 화신들은 이들 방해꾼들과 장애물들에
끊임없이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최선은 자신을 부정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난 자에게 이전의 거대한 문제들은 시시해 보이기 시작한다.
높다란 문제들이 문지방처럼 낮아지면
사랑의 화신들은 그것을 훌쩍 넘어 다음 여정으로 나아간다.
완전한 사랑이 한층 가까워졌음은 물론이다.
사랑한다는 내용은 같아도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하나도 같지 않다. 백 명의 사람들은 백 가지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특별하지 않은 사랑은 하나도 없다. -본서 중에서
소설은 좌절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완전한 사랑을 향한 여정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다를 품에 넣었다 빼서 보여주는 야자나무,
서로를 안고 있는 소나무와 때죽나무,
그리고 나무들이 좌절을 극복하고 사랑을 완성하도록
자기를 희생하는 물푸레나무들(!)에 이르기 까지
소설은 저마다 특별한 나무들의 사생활을 보여준다.
남자가 이미 결혼을 했다거나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상의 사정이었고, 현실의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상과 현실을 떠나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존재는 상황을 초월한다. 존재를 규정하는 씨줄이 지워진 때문이다. 씨줄과의 연합 없이 날줄만으로 존재의 좌표가 그려질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의 말대로 그곳은 현실의 어딘가에 ‘있는’ 곳이 아니었고, 지상이 아니었다. -본서 중에서
장편 소설 초반부에는 높낮이에 상관없이
진입장벽이 버티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무들의 사생활>에는 진입장벽이 없었다.
첫 문단부터 술술 잘 읽혔고, 끝까지 가독성이 높았다.
말인 즉은 짭짤하게 재밌었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쉬운 시나리오, 연출, 연기, 편집,
그리고 구태의연한 캐릭터들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예쁘고, 내용이 자극적인 까닭이다.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가 상당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신화야말로 막장 이야기의 근원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나무들의 사생활>이 처음부터 재밌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용의 막장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막장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품격 있는 문학 소설이다.
잘 설계된 문학적 구조를 토대로
멋진 문학적인 문장으로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무로의 변신은 아니지만,
나 역시 자기 부정을 통한 변신을 진행 중이다.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의 여정은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든 경로와 도착지가 모조리 그분이다.
그분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그분인 것은 아니다.
그분은 항상 사랑보다 크다.
사랑의 길 끝에 완전한 사랑이신 그분이 계신다.
그리고 그분께로 향하는 길마다 사랑이 가득하다.
목적과 수단이 같은 것이 사랑의 여정인 까닭이다.
사랑으로 시작되어 사랑으로 점철된 길을 걷다가
마침내 완성된 사랑에 도착하는 여정에서
나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자기 부정을 통해 작아지고 작아지며,
쪼개지고 또 쪼개지면서
거인(巨人)이 되어가는 것이다. ㅎ~
#July. 8.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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