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가이어의 책, <영혼의 추적자>를 읽고.
누가복음 15장은 마치 3화음으로 구성된 악보 같다.
기본음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이야기다.
누가는 그 위에 잃어버린 동전(드라크마)을 찾는
여자 이야기를 3도로 쌓은 후,
다시 그 위에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 이야기를 5도 쌓아 완성한다.
부제 ‘잃어버린 3종 세트 찾기’를 펴서
다시 연주(묵상)해본 것은 얼마 전이었다.
지난 2월, 누가복음 15장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잃어버린 대상에 따라
찾는 방법도 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생물인 양, 무생물인 동전,
그리고 인격인 사람은 각각 전혀 다른 존재자다.
그러므로 ‘찾아내기’라는 목표는 같을지언정,
구체적으로 찾는 방법이 같을 수는 없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목자는
양의 발자취를 따라 추격하여 멀리까지 간다.
핸드헬드(handheld)로 카메라를 들고 발 빠르게 양을 추적한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서 여자는
온 집안을 샅샅이 쓸면서 꼼꼼히 들여다본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후 클로우즈업(close-up)으로
사물들을 바짝 끌어당겨 작은 티끌까지 모조리 탐색한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서 아버지는
멀리까지 나가 아들을 기다린다.
카메라를 고정시킨 후 롱 테이크(long take)로 먼 풍경을 담은 후,
아들이 프레임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캔 가이어의 책, <영혼의 추적자>는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점은 잃어버린 영혼이란 단순히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있는 잃어버린 부분(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들을 포함한다.
이 때 사람 안의 잃어버린 부분이란
쉽게 말하면 교리적으로 아직 성화되지 못한 죄성을 뜻한다.
작가는 시와 글과 성경으로부터 영혼의 추적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퍼온다.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
앤 라모트의 ‘하늘의 길고양이’,
예레미야의 ‘덤불에 매복한 사자’,
누가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와 같은
비유적 이미지들을 차례대로 소환한다.
집요하게 끝까지 추적하여 기필코 잃어버린 영혼,
곧 아웃사이더(outsider)를 찾아내시는 하나님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이와 같은 전략은 대략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내 눈에는
작지 않은 하자가 하나 보인다.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추적자 하나님은 단벌 사냥꾼이다.
언제나 능동태만 입고 있다.
작가의 하나님은 매양 능동적이고 주도적이다.
그래서 더러 일방적이고도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누가(Luke)가 이미 알려준 바와 같이
기다림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방법들 중 하나다.
특별히 인격적인 사람을 찾는 최선의 방법이 기다림이다.
억지로 찾아다 놓으면 또다시 도망칠 수 있는 것이
두 발 달린 사람이다.
찾아지길 고대하면서 제 발로 돌아온 자를 얼싸 안아 찾을 때,
사람 찾는 일은 비로소 마무리 된다.
이런 점에서 수동적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능동적인 추적이다.
아버지는 떠나버린 둘째 아들을 추적한다.
매일 동구 밖에 나가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들이 먼 나라에서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할 때까지,
기근으로 배고픔으로 지칠 때까지,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기억할 때까지,
그리고 모든 수치를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적극적으로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카메라 프레임에 작은 점 하나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작은 점이 점점 커지면서 걸음걸이가 포착된다.
영락없는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가 카메라 프레임 속으로 뛰어든다.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간다.
아직 집은 먼 데, 둘째 아들은
벌써부터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잃어버렸던 아들이
비로소 추적자의 손에 붙들려 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더 이상의 도망침은 없다.
개인적으로 내 영혼의 추적자는 사냥개도,
길고양이도, 사자도, 목자도 아니다.
그분은 술래다.
우리는 숨바꼭질 중인 것이다.
“가위 바위 보.”
항상은 아니더라도 많은 경우 술래는 하나님이다.
더러 내가 숨은 그분을 찾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분이 숨은 나를 찾는다.
술래의 허용(!) 안에서 나는 재빨리 숨는다.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꼭꼭 숨는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다.
결국 술래에게 발견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숨바꼭질 중이니까.
술래가 나를 찾기 시작하면,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 된다.
때때로 나는 금세 찾아지기도 한다.
“여기 있다!”
술래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순순히 술래 앞에 나간다.
까르르 웃는 술래를 따라 나도 웃는다.
하지만 술래가 나를 영 못 찾을 때도 있다.
아니, 어쩌면 술래가 못 찾는 척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술래는 큰 소리로 외친다.
“못 찾겠다, 꾀꼬리!”
술래가 수동태를 입고 기다린다.
숨은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술래가 조용히 기다릴 때,
나는 슬그머니 술래에게 다가간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죄성,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
힌놈 골짜기의 쓰레기들이 술래에게 발견된다.
술래는 냉큼 달려와 잃어버렸던 나를 냉큼 안는다.
놀란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몸부림친다.
그러나 놓칠 리 없는 술래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를 붙잡아
깨끗이 씻긴 뒤 좋은 옷으로 갈아입힌다.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신발을 신긴 후 잔치에 데리고 간다.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다!”
술래의 사랑 때문에 눈물이 쏟아져 흐른다.
눈물의 강을 따라 잃어버린 나는
이미 발견된 나에게로 흘러간다.
그렇게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온전해진다.
할렐루야!
개인적으로
캔 가이어의 책들 중 좋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이 번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의 문장에 묻어있는
연약하고 슬픈 감성이 좋았던 것 같다.
그것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이나 빼어난 깊이와 통찰력을 기대하고
책을 찾았다면, 주소가 틀렸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함이 피워낸 하얀 슬픔을 인정하는 독자라면
그의 책에서 얼마간 위로를 받을 것이다.
어쩌면 부끄러운 그 하얀 꽃으로
내면의 거실을 꾸미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May. 7.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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