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booK

실낙원

창고지기들 2022. 9. 17. 13:03

 

 

 

 

 

존 밀턴의 책, <실낙원>을 읽고.

 

 

성경 묵상가로 스스로를 임명해버린 나지만, 내게 성경은 그것의 제작자이신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명한 저자들을 통해 집필되고, 무구한 역사를 통해 한데 묶인 후, 그것의 독자인 교회를 통해 정경으로 인정된 책이다. 그런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성품을 배우는 동시에 그분과 마음을 나누면서 인격적으로 친밀히 교제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내게 하나님이 된다면, 나는 하나님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이게 된다.


내게 성경은 이야기책이다. 나의 성경에는 역사, 율법, 시, 편지, 예언 등 다채로운 장르가 담겨있고, 그것들은 예외 없이 내러티브를 머금고 있다. 내러티브의 골자는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을 배신함으로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 대신 희생시킴으로써 사람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보통 50부작이 넘는 고장극을 좋아하게 되었다. 정통 역사가 아닌 야사, 곧 궁중의 암투와 후궁들의 권력 다툼, 그리고 강호의 영웅호걸 등을 소재로 하는 대서사시를 즐기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은 개인적으로 때마침 취향저격이었다. 이야기는 성경의 시작인 태초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하자면 밀턴 씨는 전무후무한 베스트셀러인 성경의 프리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어쨌든 천사장으로서 권세와 은총과 신분에서 대단한 존재였던 그는, 그날 위대한 성부가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고 메시야 왕으로 삼아 기름을 붓는 것을 보고서는 시기심이 가득해서, 평소의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가 모욕과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며 참을 수 없어 했지. -본서 중에서

 

 

태초의 천지창조와 아담과 하와의 등장 이전에, 하늘에서는 대단한 전쟁이 벌어졌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그리스도를 후계로 지목한 것에 반감을 품은 사탄이 동료 천사들을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 사탄의 군대는 승기를 잡은 듯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부 하나님의 전략일 뿐이었다. 삼일 째 되는 날 성부 하나님은 드디어 성자 그리스도를 출전시켰고, 그리스도는 출중한 능력으로 사탄의 군대를 모조리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이로써 성자 그리스도는 단순히 출생이 아니라 탁월한 능력과 성품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될 만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로서는 인간을 의롭고 바른 존재로 창조했고, 타락의 유혹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타락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타락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 ... 만일 그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은 하지 못하고 오직 해야 할 일들만을 해야 할 것이니, 진실한 충성심과 변함없는 믿음이나 사랑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참된 증거로 보여줄 수 있겠느냐. 만일 의지와 이성(이성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둘 다 자유를 빼앗겨 쓸모없고 공허한 것이 되어 버려서, 자유롭게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필연을 섬기게 되어 있다면, 그들이 무슨 칭찬을 받을 수 있겠으며, 그들의 그런 순종으로 인해 내가 무슨 기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본서 중에서

 

 

반역에 실패한 사탄의 군대는 아홉 날 동안 지옥으로 떨어졌고, 지옥의 불 못 위에서 기절한 채 다시 아홉 날을 보낸다. 하나님은 사탄의 군대가 기절해 있는 아홉 날 중 육일에 걸쳐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과 하와을 지으신 뒤, 자유 의지와 함께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타락을 아셨고, 성자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속죄하겠다고 자원하신다. 

 

 

너를 유혹해서 자신의 재앙을 함께 받게 하는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지존자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기 될 것이기 때문에, 사탄은 그런 식으로 지존자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고 그 마음에 큰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지. ... 그들은 얼마든지 견고히 서서 끝까지 순종할 수 있었는데도, 결국 불순종을 해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범죄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라. -본서 중에서

 

 

사탄은 하나님이 타락 천사들을 대신하여 새롭게 창조하신 인간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수를 하려고 한다.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온 사탄은 혼돈계를 지나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몰래 잠입한 뒤, 뱀 속으로 숨어들어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하와를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홀로 영원히 사느니 하와와 함께 죽음을 맞겠다는 아담까지 그의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거룩한 창조 세계에 죄와 사망을 들이는데 성공한다.

 

 

인간이 서툴러서 무슨 말로 기도해야 할지 몰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니, 나를 변호인으로 삼아 인간을 위해 해명하게 해주시고, 나를 대속제물로 삼아,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을 내게로 돌리십시오. 나의 공로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하고, 나의 죽음으로 인간의 모든 죄악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나의 청원을 받아들여주셔서, 나로 말미암아 인간으로부터 올라온 이 기도를 흠향하심으로써, 서글픈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내려진 심판을 따라 죽음이 임하여(내가 이렇게 탄원하는 것은 그 죽음을 무효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완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더 나은 삶으로 옮겨져, 당신과 내가 하나이듯이 나의 모든 속량함을 받은 자들도 나와 하나가 되어서 나와 함께 기쁨과 지극한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들 동안에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과 화해하고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본서 중에서

 

 

이후 타락의 결과로 죽게 된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허락된 낙원에서 쫓겨난다. 실낙원, 곧 낙원을 잃어버린 일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벌어졌고, 낙원에서 쫓겨나기 전 하나님의 명을 받은 천사 미카엘은 장차 일어날 일, 곧 실낙원 이후의 일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파노라마로 아담에게 보여준 뒤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하지만 참된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바른 이성과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하고, 이성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너의 원죄 이후로 인간 세상에 참된 자유는 상실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 안에 있는 이성이 흐려지거나, 이간이 이성에 순종하지 않게 되면, 그 즉시 무절제한 욕망들과 끓어오르는 격정들이 이성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아서, 그때까지 자유로웠던 인간을 노예상태로 전락시키고 말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내면에서 자격도 없는 합당하지도 않은 힘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로운 이성을 다스리도록 허용할 때,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으로서, 그들이 외적으로 폭군들에게 굴종하여 그 압제 밑에서 외적인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천상의 이야기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고 설명하여 들려주는 일의 한계를 천사들은 분명히 한다. 그런 이유로 밀턴은 태초에 인간이 낙원을 잃어버리게 된 이야기를 철학, 과학, 지리학, 신화, 인문학 등 각종 지식과 비유와 상징들을 믹스매치(mix-match) 하여 창의적이면서도 기품 있게 들려준다. 이는 작가가 인류 역사상 가장 박식한 인물들 중 하나였음을 여실히 방증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들은 얼른 눈물을 훔쳤다. 그들 앞에는 온 세상이 펼쳐져 있었고, 그들은 이제 그 중 어느 곳을 자신들의 안식처로 선택해야 할지를 정해야 할 것이었지만, 섭리가 그들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이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서 유랑의 발걸음을 서서히 옮겨, 에덴을 지나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갔다. -본서 마지막 문단

 

 

밀턴이 들려준 성경의 프리퀄은 퍽 신선했다. 그리고 타락의 과정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디테일하게 보여준 것 역시 몹시 흥미로웠다. 특별히 성경의 본문을 나와는 다르게 해석하여 들려주는 부분이 더러 있었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물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과 논리적인 약점들도 있었으나, 작품 자체가 워낙 재미있어서 그런 것은 독서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침 창세기를 묵상하고 있는 중이라 선뜻 읽을 수 있었다. 최초의 범죄 형태가 탐식이었다는 점이 이래저래 마음에 걸린다. 먹어서 낙원에서 쫓겨나고, 먹다가 죽게 된 인간. 그런 점에서 철저한 다이어트, 곧 먹고 마심에 있어서 절제를 필요로 하는 당뇨인이 된 것은 괴로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Sep. 17.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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