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드 쿠르티브롱의 책, <내가 늙어버린 여름>을 읽고.
약하고 닳아버린 나.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 세월이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위협적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토록 믿고 있던 나 자신에게 이보다 더 큰 수모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도 몰라보게 된 몸과 세상 앞에서 점점 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드는 겁 많은 노파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본서 중에서
저자 이자벨이 늙어버린 것은 그 해 여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여름에 언니(?!)는 자신의 늙어버림을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언니가 7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수용하게 된 늙음을 나는 36살에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 늙어감에 대한 나의 푸념을 듣고 있던 산부인과 의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래봐야 그 역시 40대 후반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시절부터 나는 늙음에 대해 꾸준히 묵상해왔다. 40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시작된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노인의 것과 흡사했던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한순간에 나는 모든 생산적 일들과 관계들로부터 단절되었다. 그것은 마치 강제 징집되어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투쟁해도 살아남기에 벅찬 날들이었다. 선교지에서의 나는 문자 그대로 ‘투명인간’이 되었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독한 항해를 꾸역꾸역 이어나가야만 했다.
투명인간이 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 지나간 과거를 꺼내어 다시 조망하곤 했다. 그 때마다 회한과 통한의 눈물이 흘러내렸고,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믿음으로 고백하는가 하면, 자주 관조적인 시선을 벼르곤 했다. 육체는 분명 늙음에 무르익지 않았으나, 사회·정서적으로는 이미 늙어버린 유사 노인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행동, 내가 저지른 실수, 내가 한 노력, 나의 투쟁, 내가 거둔 승리, 내가 느낀 슬픔, 내가 받아들인 모험, 내 생각, 내가 쏟아낸 말,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천당과 지옥도 믿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사람은 살고, 그러다가 죽는다고 믿는다. -본서 중에서
작가는 무신론-세속주의자인 동시에 페미니스트다. 노인이 된 그녀를 가장 쩔쩔매게 만든 것은 인생의 의미다. 당연하다. 찰나의 피조물이 존재와 실존의 의미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은 영원한 창조주뿐인 까닭이다. 그저 살다 죽는다고 믿는 자의 인생에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자기 인생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관은 그것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래서 퍽 난감해 하는 그녀지만, 나는 오히려 인생의 의미에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그토록 똑똑한 그녀가 의구심을 품지 않는 것이 난감하다.
나의 실존적 상황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은 뒤 아이들에 의해 잠시 기억되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와 꼭 같지만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천당과 지옥과 함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내가 한 행동, 내가 저지른 실수, 내가 한 노력, 나의 투쟁, 내가 거둔 승리, 내가 느낀 슬픔, 내가 받아들인 모험, 내 생각, 내가 쏟아낸 말 등을 모두 기억해주실 것을 믿는 까닭이다. 찰나의 나를 영원하신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을 믿기에, 나는 내 인생의 의미를 느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 전엔 알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본서 중에서
저자 이자벨은 일평생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왔던, 미모는 모르겠고 지성은 확실히 있는 센 언니다. 그녀는 특유의 시니컬함과 솔직함을 토대로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해 그 해 여름에 도착한 불청객 늙음을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유수의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 교수답게 그것을 언어의 그물로 잡아서 내게 들려주었다. 무겁지 않게, 아니 오히려 가볍고 위트 있으면서 담담하게.
스스로 인생의 반反 모델(자기 엄마, 문학 속의 수많은 여성들, 곧 한 많은 인생을 살았던 여성 캐릭터들)을 나침반 삼아 자기 인생을 꾸려왔다고 고백하는 그녀가 나는 왠지 안쓰러웠다. 그녀의 삶이 리액션(reaction) 인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를 움직였던 것은 시종일관 반동, 반항, 반대였다. 액션에 대한 리액션으로 일관된 인생은 주체적일지는 몰라도 창조적일 수는 없다. 만일 리액션을 접어두고 잠시 액션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었다면, 어쩌면 그녀는 회심할 틈을 얻어 전혀 다른 인생,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보았을 지도 모른다.
노엘 샤틀레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비록 우화적인 형태로 등장한다고는 해도, 보다 급진적이다. 가령 그녀는 노화를 앞당기자고 주장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십 대에 접어들면 약간 이르다 싶을 때부터 바로 광적인 리듬으로 일이나 사회생활, 성생활에 몰두하는 삶, 곧 생산성의 노예가 되거나 쓸데없는 관계에 얽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노화에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다. <<파란 옷을 입은 여인La Dame en bleu>>의 여주인공 솔랑주는 ‘그때까지 줄곧 지니고 살아온 용감한 병정의 이미지’와 ‘매력적인 여전사라는 오래된 갑옷’을 대번에 떨쳐버린다. 노화의 표시를 애써 감추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얼굴과 몸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방치의 신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면서 느림과 쓸모없음, 투명인간처럼 남의 눈에 보이지 않기, 안락함, 욕망 부재가 주는 행복과 자유를 새로이 발견한다. 솔랑주는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체험해본다는 핑계를 대면서 요양원(한껏 이상화된 공간)에서 보내는 평온한 순간들을 만끽하기도 한다. -본서 중에서
늙음에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한 여러 작가들 중, 나는 노엘 샤틀레와 같은 부류에 속한 듯하다. 이미 오래 전에 휘황한 빛으로 가득한 무대에서 내려온 관계로, 내게 캄캄한 객석 혹은 스태프 자리는 익숙하다. 그래서 나는 짙어져가는 주름과 무럭무럭 늘어나는 흰머리에 ‘노인의 영광’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또한 갈수록 약해져 가는 나의 육체를 측은히 여기면서 살뜰히 챙겨주는 중이다.
존재감이 없는 투명인간으로서의 삶도 익숙해졌다. 처음에 그것은 나를 뼈아프게 괴롭게 했으나, 막상 받아들이고 나자 그것만큼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그런 투명인간에게도 욕망은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머러스해서 지나치게 무거운 주변을 나처럼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없으면 마치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은 무거운 존재감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깃털처럼 가볍고 미미한 내가 있을 뿐이다. 진리의 빛(light)으로 가벼워(light)진 자에게 주어진 축복은 즐거워(delight)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급히 도착한 추석을 서둘러 보낸 탓일까? 이제 막 10월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체감은 이미 10월 말이나 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단 계절만은 아닌 것 같다. 완연해지기도 전에 서둘러 느끼고, 체감하고, 인지하려는 경향이 어느새 배어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절정을 현재적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오랜 염원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직도 가을이다. 나는 늙어버린 여름을 여전히 만나지 못했다. 단지 늙어가고 있는 가을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다. 헐렁한 가을 햇살과 열이 내린 바람, 그리고 두꺼운 습기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활보하는 대기가 나는 좋다. 금세 지나가버릴 것들이기에 아까워서, 나는 더 좋기만 하다.
#Oct. 1. 2022.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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