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useppe Maria Crespi, The Scullery Maid, about 1710-15
남편의 미들네임-장기나 특기-을 내게 고르게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설거지’를 택할 것이다.
결혼 생활 20년 동안 성실하게 저녁 설거지를 해온 탓에
그릇들을 다루는 그의 손길이
경묘한 경지(?!)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그릇의 크기와 종류, 더럽게 된 이유, 지저분한 정도는
남편 앞에서 완전히 평준화된다.
(참고로 나는 그릇들을 철저히 차별해서 닦는다.)
그것들은 그저 설거지 꺼리일 뿐이고
그래서 그의 손에 잡히는 대로
닥치고 닦이는 것 외에 다른 여지가 없다.
가끔 설거지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볼 때가 있다.
찬물에 손을 담그고 설거지에 열중하는 그의 등 뒤로
수돗물소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면,
마법처럼 그는 세레나데를 부르는
로맨틱 가이(Romantic Guy)로 둔갑을 한다.
피크처럼 그릇을 쥐고 탐방거리며
물을 연주하는 그의 뒷모습은 여간 멋진 게 아니다.
20년 동안 성실하게 설거지를 하면서
신실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는
멋지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런 근사한 사람 덕분에
좋아하는 그림이 하나 추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는
주세페 마리아 크레스피(Giuseppe Maria Crespi)의 그림
<The Scullery Maid>다.
제목(그릇을 씻는 하녀)의 실체가 그릇을 닦고 있다.
그릇을 쥔 손은 먹잇감을 쥔 매의 손아귀처럼 야무지고,
그릇을 닦고 있는 다른 쪽 팔은 다부진 근육이 맺혀있다.
그릇, 손놀림, 물의 삼박자가 만들어내는 참방거리는 소리는
고즈넉한 부엌의 대기에 경쾌한 악센트를 주고 있다.
소박하고도 정갈한 그녀의 주방엔
동글동글 아기자기한 식기들이 열매처럼 자리를 잡고 맺혀있다.
손잡이가 유독 긴 프라이팬과 뒤집개가 마주보며 서로 웃는다.
나란히 매달린 솥들은 밤새 보채던 불의 등살에서 벗어나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
말끔한 접시들은 매끄러운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위쪽 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뚜껑들은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긴장과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깔끔하고 정돈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자기에게 맞춘 발판이며, 종류별로 잘 정리된 식기들이며,
곳곳에 배치된 청소도구며, 깨끗한 부엌바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주인의 슬하에 살아가고 있는 고양이가 행복해 보인다.
주인의 의자에 웅크린 채 낮잠을 즐기고 있는 그가
느낄 법한 따사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휘황한 햇빛과 한풀 꺾인 아궁이 불을 엮어 만들어낸 온기에
흠뻑 안겨있는 고양이 곁에서 나는 한동안 나른함에 취한다.
그러다 곧 눈을 비비며 그릇을 씻고 있는
그녀의 등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눈이 부시다.
열린 창문 가득 실크 스카프 같은 부드러운 햇빛이 쏟아져서는
부엌을 살뜰하게 매만지고 있다.
햇살의 손은 젖은 식기들의 볼을 어루만지는
보송보송 마른 수건이 되기도 하고,
성실하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와 등을
흠뻑 토닥여주는 주님의 손이 되기도 한다.
‘잘했다,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이후로 더 많은 것을 네게 주리라!’
오늘도 남편은 그림 속 그녀처럼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닦는다.
그리고 나는 그림 속 고양이처럼 그의 등 위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안정감을 누린다.
나른한 고양이가 된 나는 잠꼬대처럼 기도한다.
성실하게 그릇을 닦는 그의 손과 머리와 어깨와 등 위에
은혜로운 그 분의 격려와 위로가 가득하기를,
그리고 설거지와 같은 허드렛일에 대한 신실함으로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기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Dec. 9. 201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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