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연스럽게 그리기 위해서
고안된 인위적(!) 원근법이 완성되었던
르네상스를 지나,
바로코 시대로 들어서기 전까지
슬금슬금 자라났던 매너리즘.
매너리즘 시대를 살아갔던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아름답고 균형 잡힌
미술의 사양들을 붙잡아
집요하고 교묘하게 비비꼬면서
자연의 미(美)대신 인공의 미를
캔버스에 불어 넣었다.
즉, 그들은 원근법과 형태를 왜곡하는가 하면
캔버스의 구성을 복잡하게 한다든지,
등장인물을 과장된 자세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일생을 그린
성화들을 두루두루 묵상하면서
문득, 매너리즘 시대의 대표 주자로 알려진
자코포 폰토르모가 그린
데포지션(Deposition) 곁을
맴맴 돌게 되었다.
데포지션이란
미술사적으로 쓰일 때
‘그리스도 강가(降架)’
즉,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폰토르모의 데포지션은
데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온 데 간 데 없고,
예수님의 시신이
여인들에게 온통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의 표정은
폰토르모가 구사하고 있는
따뜻하면서도 화사한 색체와는
몹시 대조적이게
놀람, 두려움, 비탄이 뒤섞여있다.
게다가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얼굴은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여성적 섬세함이 물씬한 두 사람의 얼굴은
비극 속에서 조차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런데 저 멀리,
완벽하게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면서
비탄에 잠긴 여인들의 모습을
무심하게 보고 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사랑했던 자들은
예수님의 사도들이 아니라,
(그들은 일찌감치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 분을 따라다니면서
가진 재산으로 예수님을 극진히 봉양하던
여인들(각종 마리아들과 그 외 여인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보다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던
폰토르모(결혼도 아니 하고 홀로 살면서
병적인 섬세함으로 그림을 그려냈던!)는
여성 일색의 자신만의 데포지션을 그려내고 있다.
여성에게 포커를 맞추고 있기에
폰토르모는 남성들에게 어필되는
구원사적이고 구속사적인 십자가는
일찌감치 치워버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붙들고 있는
여인들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그림 속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완전하게 당황스러워하고,
완전하게 놀라고,
완전하게 두려워하고,
완전하게 비탄에 잠겨 있다!
이 때 폰토르모는
여인들의 완전한 비탄의 모습을
핑크와 스카이블루라는
아름답고 따뜻한 색채로 그려내고 있다.
대개의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폰토르모가 매너리즘 작가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아한 색채의 향연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폄하한다.
그러나 따뜻하고 우아한 색채가
내게는 오히려 여인들의 표정
즉, 두려움, 당황, 놀람, 비탄의 표정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예수님의 시신을 받치고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되는
사람의 몸통은 온통 핑크빛인데,
그런 정육점(?) 효과로 인해서
그녀(!)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가장 절망에 빠진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폰토르모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여인들의 비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한 것 같다.
예수님의 시신은
폰토르모 그림 속에서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따뜻하게 보듬어지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국,
이 그림 밖에서
여인들의 철저한 비탄을 뚫고
말씀대로 기어이 살아나셔서
여인들의 상처(!)를 온전히 회복시키시며,
여인들의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신다!
길었던 사순절 기간도 곧 끝이 난다.
사순절의 피날레인 부활절이 되면
나는 기쁨의 색인
분홍빛 스카프를 꺼내 두를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인자로 나를 둘러주시는
부활하신 그 분을 만나러 갈 것이다.
분홍색을 입에 살짝 걸고
그 분을 향해 사자처럼
달려갈 것이다.
# Mar. 21. 2008에 쓴 것을 손질하여
Apr. 17. 2014에 포스팅함.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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