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ro della Francesca, The Flagellation, 1455
그리스도의 책형(The Flagellation)
단순함과 고요함은 영성가들이 추구하는 삶의 정조(情操)다.
단순함이 딱 떨어지는 명백함과 간소함에 맞닿아 있다면,
고요함은 움직임이 없는 잠잠함과 조용함을 머금는다.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정조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면,
15세기의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가 적격일 듯하다.
위의 그림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그리스도의 책형(The Flagellation)’이다.
수학적 원근법이 지배하고 있는 그림은 구조적으로 단순하다.
인물보다 도드라져 보이는 건물은
광택이 없는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어
딱딱하고 차가운 질감을 잘 잡아내고 있다.
건물 안팎의 인물들은 별다른 움직임이나 표정이 없다.
무표정한 얼굴은 고요하다 못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마네킹을 빌려서
모델로 삼아 그렸다고 해도 믿길 정도다.
이 그림을 두고 ‘이과(理科) 그림’이라고 부른다면
화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스도의 책형(채찍질)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 중,
위의 그림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은 아마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난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듯,
책형의 폭력성을 극대화한 영화에 비하면
그림 속 그리스도의 책형은 민망할 정도다.
개인적으로 아직 영성가로 진화(?!)하지 못한 탓인지,
단순하고도 고요한 그림에서 별다른 흥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인물들의 표정이 살아있고,
이야기가 풍부한 ‘문과(文科) 그림’이
훨씬 매력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이 그림을 응시해왔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의도적으로 취향을 거슬러 불편해지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몰랐는데, 예수님도 몸 짱이에요. 배에 왕(王)자가 있어요!”
갗 믿음의 길로 들어선 아이가
십자가 위의 예수님 조각상을 보고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 나는 망극하게도 눈물까지 흘리면서 박장대소했다.
문득, 녀석에게 위의 그림 속 예수님을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주의 평강이 아이와 함께 있기를!)
그림 속 그리스도의 몸은
뒤쪽 기둥 위에 서있는 황제의 동상 못지않게 근사하다.
균형 잡힌 비율의 몸매와 탄탄한 근육,
그리고 머리에는 둘려있는 후광이
그 분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빌라도 앞에서 채찍을 맞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포즈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림 오른쪽에는 마치 트리니티(Trinity) 흉내라도 내려는 듯
삼각구도로 폼을 잡고 서있는 세 사람이 있다.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상하는 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저 세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동했던
안나스와 가야바(대제사장들), 그리고 행동대장으로 보인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18:28)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그들은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정결의식에 따라 이방인인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밖에서 빌라도의 처분을 기다리면서,
그리스도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채찍질한 후,
빌라도는 그에게서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유대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쳤다.
소요(騷擾)를 두려워했던 빌라도는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처결했다.
(요한복음 19:1-16)
그림 속의 그리스도는 안팎으로 악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모함으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공모(共謀)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합력하여 악을 이루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런 장면을 명징한 수학적 원근법과
맑은 색체로 담담하면서도 고요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내게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해준다.
하나는 악은 어둡고 음습하고 복잡한 곳에만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밝고 깨끗하고 명료한 곳에서도 기승한다는 것이다.
저토록 맑고 매끈한 조형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에서,
저토록 청명하고 푸르른 날에,
그토록 끔찍한 죄악이 대수롭지 않게 벌어지다니!
다른 하나는, 이과(理科) 기질의 화가가
수학적 원근법에 대한 맹렬한 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박제했다는 것이다.
수학적 원근법에 따라 조형된 건물의 바닥과 천장은
시각적인 명쾌함과 시원함을 선사해 주고 있다.
그에 비하면 이상적인 몸을 가진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무표정한 인물들은 건물, 나아가 수학적 원근법이라는
미술 기법을 위한 들러리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책형’은
수학적 원근법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나 다름없다.
위의 그림을 볼 때마다
‘조직 신학’이 연상되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조직이라는 명징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그 시스템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겨 넣고는
그것이 신학의 완성인양 의기양양 하는 조직 신학이
화가의 수학적 원근법과 닮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완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본 하나님은 무모한 바보고, 오래 참음의 왕이다.
수학적 원근법에 갇히고,
교리 등 각종 신학에 의해 제한 당하고,
오해와 편견에 의해 거절당해도
사랑 밖에 할 줄 몰라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모한 바보고,
아들을 통해 돌아올 탕자들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오래 참음의 아버지다.
고난 주간이 지나가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흐르고 있다.
우기에 발을 담근 케냐의 어깨에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버지의 사랑이 어깨를 감싼다.
흙먼지 날리는 대지와 내 영혼이 흠씬 안기겠다.
#Apr. 2. 2015. 고난주간에.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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