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시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랜드, 브라이스, 자이언 캐니언(Canyon)과
조촐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왜소하기만 했던 우리는
이들 거대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
새벽밥을 먹으면서 4박 5일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야만 했었다.^^;
캐니언 삼총사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친구는
자이언 캐니언이었다.
워낙 유명한 그랜드 캐니언과
브라이스 캐니언을 뒤로하고
자이언 캐니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사적인 앵글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하이 앵글로
그랜드와 브라이스 캐니언을 먼저 만났는데,
이들 캐니언의 광경은
분명 대단히 멋지고 근사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캐니어만의 특유의 매력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만났던
자이언 캐니언은 달랐다.
나는 그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로우 앵글로 처음 대면했는데,
캐니언 특유의 압도적인 무게감과
단단한 질감을 쫄깃하게 맛볼 수 있었다.ㅎ~
그림 속의 배경이
그 시절의 자이언 캐니언과 닮아서였을까?
사순절에 접어들면서 나는
만테냐의 ‘동산에서의 고뇌’ 앞을
서성이고, 또 서성거렸다.
만테냐의 겟세마네 동산은
자이언 캐니언적이다.
그래서 황량하고, 차갑고,
무겁고, 딱딱하기가 말도 못하다.
간혹 보이는 귀여운 토끼는
무거운 광물적 배경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아울러 만테냐는 예수님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예루살렘 성도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광물로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마도 타협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힘을 가졌던
고대 로마의 건축물과 조각에 대한 남다른 조예와
조각가 도나텔로의 영향으로 만테냐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예루살렘을
딱딱하고도 무거운 광물로 형상화시켰던 것 같다.
더불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
곧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하다는 무거운 뜻이
광물성과 잘 맞아 떨어졌기에
만테냐는 겟세마네 역시
광물로 형상화시켰던 것 같다.
멀리 가룟 유다를 선두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일군의 무리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뜻인
무거운 십자가의 계시를 받고 계신다.
이 와중에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주검을 먹는 검은 독수리는
탐욕스럽게 예수님을 응시하고 있다.
로마 황제 외의 신,
예루살렘 성전 외의 신은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로마와 예루살렘의 굳은 의지와
그들을 포함한 전 인류를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뜻이
그림 속에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긴장감 넘치는 상황 속에서
세 명의 제자가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입까지 벌리고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만테냐는 이들 한심한(?!) 제자들에게도
예수님과 똑같은 후광(Halo)을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후광이란 미술에서
거룩한 존재의 머리 둘레를 두르는
원형 광채를 말한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태복음 26:40)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고 싶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한 순간도
예수님과 함께 있어 주지 못했다.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뜻의
긍휼(Compassion)이 없는 세상은
만테냐의 그림처럼
차갑고, 딱딱하고, 외롭다.
그런 세상을 코지(cozy)하게 하시기 위해,
따뜻하고, 부드럽고, 외롭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지금 홀로 고통을 당하신다.
이 때 제자들이 한 일이라곤
입을 벌리고 잠자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들의 후광은 절대로 박탈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이 후광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인 것이다!
입 벌리고 자고 있는 제자들이
교회들 같이 느껴져서
한 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림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비록 교회들이 흉물스럽게 널브러져 자고 있어
손가락질을 당한다고 해도,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바로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구속)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말이다.
만테냐의 그림 속을
걷고 또 걷다 보니
몸 안에 한기가 가득이다.
고난주간이 다 가고 나면,
그래서 그 분이 기어이 부활하시고 나면
우리집 차가운 바닥을 포근하게 덮어줄
조그만 카펫 하나를 마련하고 싶다.
키리에 엘레이손!
#Mar. 26. 2013.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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