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복통 치유기
드디어 성취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귀환에 앞서 에스라가 한 일은
자기 정체성을 오롯이 하는 것이었다.
시작은 혈통으로부터였다.
무려 아론과 엘르아살과 비느하스를 잇는
대제사장 가문의 직계 자손,
에스라는 소위 말하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게다가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자,
바벨론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말하자면 바벨론(페르시아)과 유대 양쪽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기린아이자,
70년 포로시절을 뒤로하고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라는 은혜의 때를 만난 풍운아였다.
그런 에스라에게 사명이 주어졌다.
지금껏 연구하고 준행해온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이스라엘 자손,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과 함께
2차 행렬을 이루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감사하게도 그들 무리는
네달 만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를 두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 때문(에스라 7:9)이라고 고백했다.
오래 전에,
유학생 사모님들의 책모임을 인도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나눴는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자기 가문 소개로 이어졌다.
돌아가면서 자신이 신앙의 가문 몇 대손인지를 나누다 보니,
19세기 말 개신교 초창기 때에 세례를 받은 분의 후손이 등장했다.
열댓 명쯤 되는 사모님들은 탄성을 질렀다.
그러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띤 한 사모님이 등판을 했다.
그녀는 우리가 한창 나누고 있던 책의 중간쯤을 활짝 열어젖혔다.
순교자 명단이 적혀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순교자 명단 중간을 가리켰다.
바로 그 분이 자신의 직계 조상이라는 자랑스러운 설명이 이어지자,
우리들은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끝판왕인 순교자의 자손이 등장으로
더 이상의 가문 자랑은 없었다.
혈통적으로 내게는 신앙의 조상이 없다.
신앙의 1세대로서,
말하자면 나는 신앙의 가문의 시조다.
신학교에 입학 한 뒤,
신앙 가문의 전통과 저력에 대한 풍문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것은 내게 궁금증을 자아냈고, 호기심은 선망을 낳았다.
그런데 무려 한국 초대 세례자의 후손과
나아가 순교자의 자손과 함께 책모임을 하고 있다니,
나는 몹시 흥분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부러움에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케냐 선교를 마무리 하고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동네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는데,
운동 삼아 걸을 때마다 회당을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 되면 유대인 어른과 아이들이
속속들이 회당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대놓고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함께 걷던 남편이 의아해 하며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들은 장자고, 우리는 입양아니까!
장자인 저들이 부러운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에스라는 그들의 조상들 중 하나다.
아론과 엘르아살과 비느하스의 직계 자손이자
유명한 율법 학자였던 에스라는 내게는 더없이 부러운 존재다.
하나님의 특혜가 그에게 집중된 것만 같아
부러움이 한도를 초과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사명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일.
그것은 에스라의 사명이자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비록 출신과 능력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긴 해도 말이다.ㅋ
그 날은 아침부터 배가 아팠다.
새벽부터 영적 사촌인 에스라를 질투했던 까닭이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툴툴거리고 있었을 때,
그분의 손이 나의 배를 문질러주셨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왜 이렇게 골이 났을까?”
“다, 아시면서.”
“에스라 때문에?”
“…….”
“에스라가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자 탁월한 율법학자여서?”
“…….”
“그러면 뭐해. 너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걸.”
“네에?”
“너는 멜기세덱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후손이자
성령의 지도를 받고 있는 묵상가잖아!”
“치이~”
원더풀 카운슬러의 말은 약이 되어 온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얼굴에까지 미치자 미소가 번졌다.
이내 복통은 가라앉았다.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그리스도의 후손이자,
성령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묵상가라고?’
나는 그분의 말씀을 속으로 다시 읊조렸다.
에스라가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ㅋ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장기하의 노래, <부럽지가 않어> 중에서
#Jul. 16.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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