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그 아침에 도착한 말씀은 돋보기였다.
누가복음 22장 24-34절을 들고
실존의 안팎을 두루 비추어보았다.
대체로 선명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볼록렌즈에 또렷이 잡히는 것이 포착되었다.
커다랗게 불거져 나온 것은 그 때 그 일이었다.
갚을 것은 이미 다 갚은 완결된 일이었음에도,
미처 사라지지 않은 실패감과 수치심이 보였다.
지금껏 수많은 말로 번역하고,
다각도로 조망하여 의미를 해석해왔기에
더 이상 크게 주목할 것은 없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왜 다시 그 일이 말씀에 포획된 것일까?
“우리 중에서 누가 더 크냐?”
십자가가 코앞에 임박했음에도 제자들은 서열 다툼이나 하고 있었다.
그 때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에 와서 보니, 그녀와 내가 했던 것은
임박한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같은 서열 다툼이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누가복음 22:25-27)
가까이 닥쳐온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주님은 큰 자란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들릴 턱이 없는 우리였다.
자고로 큰 자라 함은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라는 세속적 권력에 매혹된 까닭이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한 채
서로에게 섬김을 요구했다.
상대의 섬김을 갈취하기 위해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는 억압하며 강요했고, 나는 무시하며 조롱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누가복음 22:28-30)
이를 보다 못한 주님이 중재자로 출동하셨다.
그깟 한 주먹꺼리도 안 되는 권력일랑은
미련 없이 포기하라는 경고성 사이렌이 울렸다.
군림하여 섬김을 착취하는 대신에
상대를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된다면
왕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왕의 자녀가 될 것이고,
그러면 보좌에 앉아 주의 백성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미 권력에 마음을 송두리째 바친 우리는
주의 약속을 받을 수 없었다.
하찮은 권력일지라도 어떻게든 분양을 받아
마음껏 누리고 싶어 안달이 났을 뿐이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복음 22:31-32)
말씀을 한 톨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들이
권력 다툼에 열중하고 있었을 때였다.
사탄이 주님께 매달렸다.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주님은 대뜸 수락하셨다.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성부께 간구하셨다.
그리고 회개한 후에 다시 형제들을 굳게 하라는
사명도 미리 준비해 두셨다.
사탄의 도정(搗精)은 지독했다.
밀의 쭉정이마냥 우리를 감싸고 있던 정욕의 껍질들을
쉴 새 없이 부딪히게 하고 부대끼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자비하게 서로를 할퀴었고,
쉬이 나을 수 없는 깊은 상처들을 무수하게 새겼다.
특별히 경쟁심은 우리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주범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나음을 증명해보라고 부추겼다.
경쟁이 교만의 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우리 안의 교만을 간파한 사탄이 경쟁심을 빌미로
우리로 서로를 미워하도록 끈질기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탄의 도정 작업은
주께서 우리들의 정욕을 벗겨낼 요량으로 허락하신 은혜이기도 하다.
애타게 주께 도움을 요청해도 서열 경쟁에서
우리를 빨리 구해주지 않으신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누가복음 22:33)
그 시절 나는 베드로였다.
경쟁 상대에게 보란 듯이 말하고 행동했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의롭고, 더 충성되며, 더 신실할 뿐만 아니라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34)
의기양양하게 단언했던 나에게
주님은 세 번의 부인(否認)을 말씀하셨다.
물론, 정욕의 휩싸인 내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부인했다.
이번만큼은 주님의 그름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옳은 쪽은 언제나 주님이었다.
경쟁적으로 선택했던 그 길에서 나는
감사와 찬송이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급기야 무능력하고 연약한 내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퍽 오랫동안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발버둥 쳤다.
작은 구명 튜브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게다가 여전히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더욱이,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는 일까지 하는 중이다.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말씀의 돋보기를 거둔 후, 침침해진 눈을 비빈다.
감은 눈이 창조해낸 스크린 위로 지금껏 경험해온
사탄의 뜨거운 밀 까부름이 빠르게 상영된다.
그리고 여전한 일상의 사소한 시험들이 보여진다.
잠든 틈을 타고 사탄이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치기를 반복하는 까닭일 테다.
판단(사람들을 분류하고 비난하며
그들의 아픔이나 고통에 참여하기를 거부함),
조작(위치를 확고히 하거나 보상을 받으려고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이용함),
비평(다른 이들의 관점을 보지 않으려함),
자만(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여김),
증오(분노를 다루지 않고 키우고 간직함) 등이
말씀보다 더 빠르고 크게 자라나 시험에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이루어주시는 것은
자신의 뜻에 합당한 성자의 기도다.
그러니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한 시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 된다.
키리에 엘레이손!
#May. 27.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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