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의 기쁨
*
방바닥은 냉골이었다.
깜박하고 보일러 켜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방금 틀어놓았으니 곧 따뜻해질 거라는 말이 보태졌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감히 그것을 까먹을 수가 있느냐며 비난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멋쩍게 웃어 넘겼다.
케냐를 떠나 한국에 도착했던 그 때는 12월이었다.
건기를 지나던 케냐는 한 여름이었으나,
한국은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었다.
살갗에 닿는 찬바람은 몸뿐 아니라 마음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런데 몇 주간 묵기로 한 숙소,
그것도 교회 옥상에 마련된 허름한 유치부 예배실에 도착했을 때,
맞아주는 것이 고작 차디찬 방바닥이라니!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잠시 귀국한 선교사를
홀대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공동체 내의 작은 자들과 거듭 죄를 짓는 연약한 형제가 있거든
자기 목숨보다 그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자 제자 중의 제자였던 사도들이 예수께 대뜸 요청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5)
사도들의 요구에는 특권 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자들과
죄를 상습적으로 짓는 형제들을 섬기는 일은
평범한 제자들에게나 적합한 사역이었다.
자신들처럼 주께서 특별히 뽑은 사도들에게는
응당 크고 중대한 일이 맡겨져야 하고,
그런 관계로 그들에게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믿음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특권 의식에서 나온 요구는 무례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사도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누가복음 15:6)
믿음은 있고 없고의 문제이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씨앗들 중 가장 작다는 겨자씨,
딱 그 정도의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할 것은 믿음의 크기나 양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를 제자들 보다 높다고 여겼던 사도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맞아, 내가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너희를 사도로 직접 뽑아 세웠지.
교회(집) 밖에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밭을 갈거나 양을 치라고)하라고 말이야.
하지만 할 일을 끝내고 교회에 돌아왔다고 해서
환대를 받으며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실 생각일랑은 집어치워.
오히려 주인의 명령을 따라
연약한 성도들에게 먹일 말씀을 준비하여,
그들이 그것을 먹는 동안 시중을 들어야 해.
그 후에야 비로소 너희도 먹고 마실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교회 안팎의 모든 일을 다 완수한 후에도
칭찬이나 인정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
그냥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렴.
그것이 내가 너희를 사도로 뽑은 이유니까.”
(누가복음 17:7-10)
사도란 ‘보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 나라(복음이신 예수님)를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가 사도다.
그러니까 오래 전 선교사로 파송 받았을 때,
나는 일종의 사도가 된 것이다.
집 밖인 해외 선교지로 나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동시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자녀들을 위한 먹을 것을 준비하여
시중 들어야 했음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님은 교회 안팎에서 수고하라고 나를 뽑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하고도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라며 나를 세우셨다.
보냄 받은 자, 곧 선교사들이 받는 흔한 오해가 있다.
그들의 믿음은 보통의 신앙인들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편견이다.
틀렸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해주셨듯이 믿음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있고 없고의 문제다.
관건은 순종이다.
보냄 받은 자는 은혜로 주어져 있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한 사람이다.
더 큰 믿음 때문에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함으로 보냄을 받은 것뿐이다.
*
오래 전 그 겨울,
그 냉골인 허름한 유치부 예배실에 다시 서본다.
보일러 트는 것을 잊어버린 자를 향한 비난하는 눈빛과
치밀어 오르는 화를 지우개로 말끔히 지운다.
그리고는 그 시절의 혈기왕성한 나를 안고 토닥여준다.
“상예야, 너는 일개 보냄 받은 자이잖니?
그러니까 밖에서 수고하고 왔다고
안에서 환대해줄 거라는 기대는 옳지 않아.”
이제 나는 밖에서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안으로 돌아왔다.
쉴 틈도 없이 주인의 자녀들이 먹고 마실 양식을 공급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익한 종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있다.
주인 덕분이다.
내 주인은 은혜와 자비와 긍휼의 왕이시다.
절대로 불의한 일을 시키지 않으시며,
진리를 행하도록 명하신다.
성과나 성취, 생산성과 효율성을 따라 종을 평가하는 대신에,
순전한 마음으로 인내로 끝까지 순종하는 종을 기뻐하신다.
게다가 종의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책임지신다.
이는 종이 실수나 실패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해준다.
대신에 종은 책임져주시는 주인을 신뢰하면서
마음껏 장사하면 된다.
맡겨주신 달란트를 밑천으로 재밌게 장사하고
이문을 남기면서 기뻐하며 감사하면 된다.
설령 손해를 볼지라도 책임져 주시는 주인이
하루 빨리 돌아오셔서 자신이 남긴 이문을
즐거워해주시기를 소망하면 된다.
키리에 엘레이손!
#Apr. 16.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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