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위일체(The Holy Trinity)는
교의신학에서 만들어낸 용어로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세 위격(位格)이
하나의 실체(實體)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고,
셋이면서 완전히 하나이신
거룩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야.”
지나간 내 신학대원 시절의 랍비들은
삼위일체를 문자 그대로
숫자놀음으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개념은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는
X파일(?!)에 속한 개념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했었다.
입으로는 ‘문자주의’를 비판했던 그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주의를 온 몸으로 받아
그것을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이후 ‘순전한 기독교’를 통해서 만났던
C. S. 루이스는 삼위일체 개념을
도형의 메타포를 써서 설명해주었다.
즉, 삼위일체란
2차원적 평면의 개념이 아니라
3차원적 도형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은 2차원의 것이지만,
삼각기둥은 3차원의 것인데,
삼위일체는 삼각기둥과 같이
입체적인 차원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이스의 설명은
내 지나간 랍비들의 것과 비교하면
월등히 나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교수였던 그의 설명 역시
학교의 언어를 사용하여
지식과 정보 전달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왜 하나님께서 교회의 교의신학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성도들에게 가르치려 하셨는지,
삼위일체가 성도들의 삶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루이스의 설명에서도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렇다면 학교의 언어 밖에 모르는
안쓰럽고 재미없는 학자들 말고
상상력이 풍성했던 화가들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설명이 아니라 표현!)
위의 그림은 그 이름도 유명한
엘 그레코(El Greco) 화백의
‘ The Holy Trinity'(1577-1579)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엘 그레코의 본명은
조금은 장황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Domenicos Theotocopoulos)다.
그러나 엘 그레코가 주로 활동했던 곳이
스페인(특별히 톨레도)였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불렸고,
그것이 그의 작가명까지 되어 버렸다.
스페인에서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스 놈’이라고 불렸던 엘 그레코.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코리안’이라고 불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
만일 내가 그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고 말하면
그는 아마도 쉰 소리를 한다며
피식 웃을 것만 같다.^^;
어린 시절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가 탐스럽게 길러 낸
티치아노를 비롯하여
틴토레토와 미켈란젤로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러나 엘 그레코에게 그들은
한 때 젖을 주었던 유모였을 뿐이었다.
유모의 풍성한 젖을 먹고 자란 엘 그레코는
유모의 품을 떠나 전혀 다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으니 말이다.
엘 그레코의 주력 장르는
종교화와 초상화였다.
그는 주로 세로로 긴 캔버스를 이용하여
영적인 메시지를 흑 회색 톤으로
다소 무겁게 형상화시켰으면,
과감하게 깊은 명암으로
무거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게다가 그의 드로잉은
인체를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색은 말년으로 갈수록 극단으로 치달아
인물과 풍경은 더욱 심하게 뒤틀어 놓고 있다.
현대의 표현주의 그림과
맞장을 떠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듯 시대와 전혀 맞지 않는 그림 때문에
혹자는 엘 그레코가 말년에
심한 눈병을 앓았을 것이고,
그래서 시대성과 절교한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견을 내놓기도 했다.
허나, 엘 그레코를 아끼는 나로선
말년의 그의 그림들이
눈병의 산물이라는데 무조건 반대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천재성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캔버스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원천 기술인 원근법은 엘 그레코 이전,
그러니까 르네상스시대에 이미 완성되었다.
그런데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은
동시에 가상현실의 세계 또한 열어 놓았다.
즉, 화가는 원근법으로 실재하는 것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 또한
실제로 실재하는 것처럼
캔버스 위에 형상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엘 그레코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이미 간파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실재를
눈에 보이게 그려내기 위해서
정교한 재현의 도구들을
모조리 뒤틀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원근법과 드로잉,
그리고 그것을 온전하게 살아나게 하는 색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구도와 기이한 드로잉과
무모한 색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나는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빛의 예술이자,
시각 예술인 영화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영화가 총천연색의 실제 세계를 재현하는
시각성에 의존 하는 빛과 색의 예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실제의 완벽한 재현이라고 볼 수 없는
흑백 영화가 오히려 세상의 모습을
더 진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도구라고 보았다.
(물론, 이런 그의 생각은
끝없는 고심과 깊은 철학적 사유와 반성을 통해서
흑백 영화에서 색채 영화로 옮겨가게 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사람들은
세련된 재현의 도구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고쳐 썼던 것 같다.
엘 그레코나 타르코프스키처럼 말이다.
에궁 사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진리를
보여주려고 했던
엘 그레코의 성삼위일체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자.
그림에서 성삼위일체는
수직의 구도로 그려져 있다.
성령을 상징하고 있는 비둘기,
아들의 시체를 안고 있는 성부 하나님,
그리고 십자가 처형 된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
수직성의 성삼위일체를 중심으로
천사들이 수평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그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성자 하나님은
이제 막 십자가에서 내려진 듯하다.
십자가에서 내려져
성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성자 하나님의 얼굴은
깊은 잠에 빠진 듯 평온하게 보인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성자 하나님의 다문 입술이
마치 마침표처럼 보인다.
마침내 성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어드렸다는 뜻의
마침표로 말이다.
반면에 성부 하나님의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다.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하늘이 출렁 내려앉을 것 같은
깊은 탄식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듯하다.
성부 하나님의 탄식은
성자 하나님의 부재 때문인 듯싶다.
지금 성자 하나님의 영은
육신을 성부 하나님 품에 맡긴 채
죽음의 권세 아래 묶여 계시기 때문이다.
절대로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그래서 절대로 서로 단절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삼위불일체(三位不一體)의
절대 고통의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성령 하나님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만
스포트라이트로 조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은 담담하게
성부와 성자 하나님 곁에 있는
천사들의 표정까지 아낌없이 조명해주신다.
천사들의 표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어떤 천사들은 요샛말로
멘탈 붕괴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어떤 천사들은
성자 하나님을 안고 계신
성부 하나님을 곁에서 도와주고 있는 듯 보인다.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고 계시다니!
게다가 성부 하나님의 복식은
로마 카톨릭 스타일이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스타일이 아닌가?
삼류(?) 시장 옷을 입고
천사들의 부축을 받는 동시에,
수치스럽게 모두 벗겨진 채
십자가에서 죽어버렸으며,
게다가 홀로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것이 바로 엘 그레코가 그린
‘성삼위일체’다.
그의 그림 속 어디에도
완벽한 전능함이나,
화려한 아름다움,
혹은 탁월한 고귀함을 머금은
삼위일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엘 그레코는
성삼위일체를 이렇게 표현했을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을 만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허나, 피터슨 목사님은
그 누구보다 나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특별히 나는 그 분으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것을 기뻐하며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피터슨 목사님이 가르쳐주셨던
삼위일체의 핵심은 ‘인격적인 관계’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 속에서
완전히 하나로 연합 되신 분이신 것이다.
마치 부부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엘 그레코의 ‘성삼위일체’에서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에 의하여
완전히 하나로 연합되신
한 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눈을 보라.
감고 있는 성자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성부 하나님은
홀로 성자 하나님을 안는 대신
자기 피조물들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성자 하나님을 안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 역시
오로지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치지 않으시고,
하나님 곁에 있는 피조물들과
그들의 아픔까지 모두 조명하고 계신다.
완전한 인격이신 하나님!
그리고 친밀한 관계로
온전히 하나로 연합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엘 그레코의 ‘성삼위일체’가 보여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다.
성자 하나님의 오른 팔과 자세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화면 전체를 율동감 있게
느껴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부자연스러운 포즈를 털어내고
성자 하나님이 깊은 잠에서 깰 것 같은
기대를 한껏 갖게 된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엘 그레코의 ‘The Holy Trinity'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진다.
지금 내가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이렇게 앉아서
그 분을 기억하며 예배하고 있는 것은
그 분이 바로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이 성삼위일체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로
서로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를 내어주는 희생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내가 그 분과 이렇듯
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랴!
또한 그 분과 인격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어찌 내가 이 곳 아프리카에 올 수 있었으랴!
지금 케냐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딱. 딱. 딱.”
집안으로 새어 들어온 빗방울이
플라스틱 바가지를 때리는 소리가
무척 맵게 느껴진다.
그 어느 날의 망치소리 때문이리라.
#Apr. 4. 2012.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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