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패러다임 쉬프트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욥기 30:25-26)
욥은 가상의 인물이다.
그의 기본 설정은 최상급 인간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마저 인정해마지 않았던 극상품 인간, 그가 바로 욥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진열된 최고 사양의 인간에게
부귀영화가 선사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한 가지 고려해야할 것이 있다.
그의 부귀영화가 참된 부귀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완벽한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난 없는 영광이 온전할 리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욥은 한순간에 모든 재산, 명성, 관계,
그리고 건강마저 잃어버린 채 심지어 자기혐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토록 철두철미한 고난은
뜻밖에도 욥에게 커다란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3D 안경으로,
그것을 쓴 욥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3차원을 접하게 되었다.
평면적 신학에 머물러있던 그가 입체적 신학,
그러니까 나의 하나님 신학에서
하나님의 나 신학으로 차원 이동을 하게 된 것이다.
평면적 신학의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나의 하나님이다.
내가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면,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선대하시는 명쾌하고 시원시원한 하나님이다.
그러나 입체적 신학의 하나님은 다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하고 순종해도, 축복을 보장해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과 환난을 남발하듯 허락하신다.
고통 중에 부르짖어도 묵묵부답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퍽 답답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다.
말하자면, 평면적 신학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지만,
입체적 신학은 하나님을 위한 나이다.
내 뜻에 수종 드는 하나님은 쉽다.
반면, 하나님의 뜻에 수종 드는 나는 어렵다.
그것이 일종의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인 까닭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1:3-4)
욥의 하나님이 고구마라면, 하박국의 하나님은 사이다다.
하기야 욥은 시험 기간 중이었으니
시험문제를 내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알 리 없는 욥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묻는다.
공의의 하나님께 커닝은 가당치 않다.
그래서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이다.
퍽 안타까운 일이지만,
시험이 끝날 때까지 욥은 참고 기다려야만 한다.
반면, 하박국의 하나님은 신속하게 말씀해주신다.
하박국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냉큼 응답해주신다.
그런데 선지자 하박국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곧 하박국의 하나님이자 유다의 하나님이다.
하박국의 물음에 자동 응답하시고,
유다의 고통에 자동 구원을 주셔야만 하는 분이다.
그처럼 평면적 신학을 가진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자기 계획을 은밀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 하는 바벨론’이라는
강국으로 유다를 사정없이 심판하겠다고 하박국에게 귀띔하신다.
화들짝 놀란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삼키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뜻을 돌이킬 마음이 없으시다.
오히려 그 후에 일어날 바벨론의 심판을 예고하시면서,
기어이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의지를 굳게 하신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이 유다와 하박국의 하나님 이상이자,
나아가 오히려 유다와 하박국이 하나님의 것임을 드러내신다.
하박국에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믿음의 패러다임 쉬프트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일어난다.
나의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나로 전환되는 경험은 뼈아픈 일이다.
‘나의 하나님’과 함께일 때, 나는 특권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한 것이고,
나아가 세상 축복들은 나에게 마땅히 제공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오래 전, 내가 목회자였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선교사였을 때가 꼭 그랬다.
하나님의 은혜와 세상의 모든 축복들은 당연히 나의 차지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내게 주어진 것들은 축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과 환난이 떼강도처럼 정기적으로 나를 방문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나님,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라는 항변을 일삼았다.
내가 누려야 할 것들은 마땅히 축복인데,
축복은커녕 도리어 고난과 환난을 주실 수 있느냐는 항의였다.
그것은 일종의 하박국적 항변이었는데,
최상급 인간이었던 욥에게도 고난과 환난을 냅다 선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귀국을 해서도 나의 하나님은 아니 계신다.
오직 하나님의 내가 있을 뿐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노심초사 불평하고 항변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큰 에너지가 드는 불평과 항변에 쓸 정력이 턱 없이 부족하기도 할뿐더러,
내 마음보다 훨씬 중한 것이 그분의 마음이라는 것을 슬쩍 알아버린 까닭이다.
하나님의 나로 사는 일은 답답하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곧 자족하기를 배운다면,
안정감 속에서 조금씩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족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나를 목격할 수도 있을 테다.
키리에 엘레이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4:11-12)
#Jan. 1.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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