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모쪼록 어린아이

창고지기들 2021. 3. 13. 10:55

 

 

 

 

 

모쪼록 어린아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일은 예수께서 그 계획을 발표하신 직후에 시작되었다. 

근면히 섬기던 습성을 따라 

아예 자기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쳐 섬김의 절정을 

성취할 거라는 계획이었다. 

그에 대한 제자들의 처음 반응은 ‘부정’이었다. 

거듭되는 계획 발표 앞에서는

근심어린 ‘억압’과 함께 ‘무시’라는 반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청개구리의 전철을 밟기 시작했다. 

주님을 따라 섬기는 대신에,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는 상스러운 몸부림, 

곧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려는 치열한 서열투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는 일절 마음에 들지 않는 예수님의 계획에 대한 일종의 보복 행위였다.


섬김의 열매로써 기어이 죽고 말겠다는 예수님과 

섬김을 기필코 받고야 말겠다고 서열다툼을 하는 제자들, 

그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동상이몽 중이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태복음18:1)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브리핑 후에, 

제자들은 천국의 서열에 관해 물었다. 

그들의 질문은 사뭇 진진한 그래서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으나, 

사실은 한 귀퉁이가 분노로 타들어가는 가벼운 것이었다.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지핀 불이었다. 

달궈진 돌 같은 질문을 받아 드신 예수께서 하신 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마태복음 18:2)


저만치에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셨다.

 

“너희들 중 한 명만 이쪽으로 와줄래?”


흙장난을 하는 아이들, 

풀밭을 뒹굴며 씨름을 하는 아이들, 

서로 잡으려고 쫓고 쫓으며 달리는 아이들,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하는 아이들 속에서 

한 아이가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굉장히 높으신 분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믿을 수 가 없는 눈치였다. 

커진 눈망울과 뛰는 심장을 데리고 

아이는 예수께로 곧장 달려갔다.


예수께서는 부름에 냉큼 응한 아이를 제자들 한 가운데 세우셨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제자들의 얼굴마다 빠르게 번졌다. 

숱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게 되자, 아이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긴장감으로 딱딱해진 아이의 몸을 예수께서 부드럽게 안으며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천국의 서열? 

너희는 마치 천국의 입성을 떼어 놓은 당상처럼 여기는 구나. 

하지만 천국 입성이 호락호락한 일일 수 있겠느냐? 

너희가 내 제자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천국 입성이 너희에게 당연한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천국의 서열을 운운하기 전에,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관심을 집중할 일이다. 

내가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기 훨씬 이전의 아이들, 

그러니까 대략 유치원생 아이들을 의미한다. 

“엄마 아빠는 왜 이것 밖에 안 돼? 

우리 집은 왜 이 모양이야?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어?” 라는 

반항 섞인 질문을 하기 이전의 아이들을 말한다. 

이들 ‘어린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 그대로 토 달지 않고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서 

자기 부모를, 자기 집의 형편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 하영양은 어린아이였다. 

그때 그녀는 왜 미국에 가야만하냐고, 안 가면 안 되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엄마 아빠를 따라서 고생스런 미국 유학생 자녀로 살 뿐이었다. 

그러나 케냐 선교길에 오를 때는 달랐다. 

이미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터라 그녀는 왜 케냐에 가야만 하냐고, 

포기할 게 너무 많으니 안 가면 안 되냐고 지속적으로 묻곤 했었다. 

반면, 당시 어린아이였던 하진군은 달랐다. 

엄마 아빠를 따라서 선교사 자녀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씩이나 되시면 왜 그렇게 밖에 못하세요? 

대체 나를 왜 이 모양으로 창조하신 건가요? 

나를 이런 환경 속에 쳐 넣으신 저의는 뭔가요? 

왜 나에게만 이 딴 하찮은 소명을 주신 건데요? 

다른 길도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빡센 십자가의 길이죠?”


반항하면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큰 아이들과 같아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천국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처럼 

창조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믿고 

묵묵히 받아들여 삶을 살아간다면 

그 곳은 어디나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복음 18:4)


‘이 어린아이’란 예수께서 불렀을 때, 

냉큼 달려와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아이를 말한다. 

이 어린아이는 제자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예수님의 곁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어린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법한 본능, 

즉 뛰고, 구르고, 장난치고 싶은 욕구를 참고 인내하면서 

이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려 마땅한 것을 포기한 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면서 예수께 순종하는 것은 

겸손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콜링을 따라 부르신 곳에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천국에서의 큰 자는 바로 이런 자들이다.

 


케냐와 우크라이나에 서 있던 나다. 

냉큼 달려간 부르신 곳에는 보통, 

현지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할 일 없이 가만히 서있는 지난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진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참고 견디면서 

가만히 서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일은 상상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 이후에야 내가 해야 할 일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목격한 일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부르신 곳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증언하는 것이 나의 선교였다.

 


‘선교사였다며? 외국 생활을 오래했다며? 공부는 웬만큼 했다던데?’


현지인(제자)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늙어 병들고 가난한 어린아이에게는 언제나 따가운 시선이 뒤쫓는다. 

그것이 이 어린아이의 숙명이라면 

이 또한 어린아이들처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 시선을 견디면서, 

순종하여 부르신 곳에 가만히 서 있는 이는 

이미 천국 청약에 당첨된 자이다. 

분양받아 그곳에 입주하여 본격적으로 살 때까지 

그들은 미리 천국을 경험하며 사는 중이다. 

그렇게 이 어린아이는 

오직 천국에서만 큰 자로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그러니 소중한 나여, 

모쪼록 어린아이 같아라! 

키리에 엘레이손!

 

 




#Mar. 13.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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