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믿음이를 낳은 여자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태복음 15:21)
입 밖의 말은 해사하게 빛난다.
그것은 관심과 집중을 독차지하는 일종의 미녀다.
그에 비하면 행동은 주목 받지 못하는 추녀(醜女)다.
행동이 안중에 들기 어려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진심은 말보다 행동에 아낌없이 담기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식은 쉬이 간과되기에 너도나도 잘도 속는 것이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마태복음 15:24)
내 눈에는 다 보인다.
말씀은 그리하셨어도 그것이 진심일 리 없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요? 암요, 왜 아니겠어요.
그런데요, 만일 정말 그렇다면, 저주받은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굳이, 애써, 일부러 들어가신 이유는 뭔가요?
그냥 유대 지역이나 다니실 일이죠.”
“눈치 챘어? 오~ 많이 컸는데!
사실은 믿음의 산파로 출장을 간 거란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의 고함은 차라리 처절한 비명이었다.
배를 움켜쥔 여자는 창자가 끊어지기라도 하듯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산통을 겪는 임산부처럼 보였다.
고통 중에서도 여자는 거듭 예수님을 불렀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것은 명백한 믿음의 고백이었다.
“예수여, 당신은
다윗 혈통으로 태어나신 왕,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구원해주실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 바로 당신뿐입니다!”
결국, 이 상황은 믿음을 임신한 이방 여자가
산달을 맞아 길에서 그것을 낳게 된 것이었다.
산파로 등판하신 예수님은 모질기가 말도 못하셨다.
그러나 아이를 둘이나 낳아본 경험자로서
그분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출산을 돕기 위해 의사와 간호사들이 산모의 배를 강하게 누르거나
심지어 회음부를 절개한다는 것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산파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를 무시하셨다.
다음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운운하며 대놓고 거절하셨고,
마지막에는 여자를 개 취급 하면서 거세게 물리치셨다.
출산 전 최후의 비명은 개 취급 다음에 터져 나왔다.
가나안 임산부-(전심을 다하여) 주여 저를 도우소서
산파 예수님-(거세게 물리치시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가나안 임산부-(최후의 비명을 지르면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태복음 15:25-27)
최후통첩 같은 여자의 고백 후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산파는 곧바로 떡두꺼비 같은 믿음이를 강보에 쌌다.
건강하고 튼튼한 우량아였다.
산파 예수님-(믿음이를 품에 안고는 큰 기쁨으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복음 15:28)
산파 예수님의 도움으로.
이방 여자는 우량아 믿음이를 무사히 출산했다.
믿음이 덕분에 여자의 필생의 소원이었던
딸의 치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사건의 전말로 미루어 보건데,
예수님께서 믿음의 산파로 두로와 시돈에
출장을 가셨다는 말씀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 곁에 있던 제자들의 표정이 썩 좋지가 않다.
하기야 지금껏 저체중 믿음이만 줄지어 출산한 그들이 아닌가!
게다가 앞으로도 당분간은 미숙아를 계속 낳을 예정인 그들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의논하느냐(마태복음 16:8)
이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 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태복음 17:19-20)
사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가나안 이방 여자가 제자들도 낳지 못한
우량아 믿음이를 낳았다니 말이다!
예수님의 간택과
애정 어린 가르침과 첨삭 지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시종일관 미숙아 믿음이를 낳았다.
그쯤 되면 모조리 낙제시키고,
신입 제자들을 모집해 다시 시작해도
토를 달 사람이 없을 테다.
이 와중에 몹시 애통한 일은
그들 제자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이다.
제자랍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도
간혹 무서워하고, 더러 의심하며, 왕왕 정신을 딴 데 파는 거다.
만일 나였다면, 실패할 것이 빤하다는 추측(교만)만으로
예수께 들이대는 일은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가나안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거절당함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내면서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주님의 행동에 주의하면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어디서 개 취급이냐고 거세게 불평을 쏟아냈을 테다.
그럼에도 다행은 있다.
주님의 신실함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제자인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신실하심으로 기어이 큰 믿음이를 낳게 하실 그분이다.
그래서 우량아를 낳은 그녀에게
질투심이 아닌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축하도 할 수 있다.
“축하해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떡두꺼비 같은 믿음이 이렇게 낳다니, 정말 부러워요.
언젠가 저도 신실하신 주님의 도움으로
우량아 믿음이를 낳고 말겠죠?
그러니까 태어난 아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잘 키우면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파이팅해요!”
#Mar. 6.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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