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네
밀과 보리가 자라는 건
누구든지 알지요~
지금도 가끔씩 불러보는 동요들이 있다.
‘밀과 보리’도 그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노래를 하면서 짝꿍의 팔짱을 끼고
제자리를 빙빙 돌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동요 속의 화자는 불친절하다.
밀과 보리가 한데 섞여 자라는지,
아니면 따로따로 자라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 속 밀과 보리는
한데 섞여서 자라는데 말이다.
주님의 비유 속 보리는 보통 보리가 아니다.
그것은 ‘가라지’로 일컬어지는 독보리다.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는
독성 강한 알곡을 맺는 잡초, 독보리.
흥미로운 사실은 독보리의 새싹과
밀의 어린 싹이 쌍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라서 이삭을 맺을 때가 되면,
밀과 독보리는 흑과 백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추수 때, 밀과 분리된 가라지가
가차 없이 태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마태복음 13:24)
예수님의 천국은 공간이 아니라 인격이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럼에도 천국이라는 말 자체는 명백히 공간적이다.
그러니까 천국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주인이자,
주인이 주도적으로 좋은 씨를 뿌린
주인 소유의 밀밭이기도 하다.
이 때 좋은 씨란 곧 밀의 씨앗이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해석에 따르면(마태복음 13:37-43),
밀밭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밀밭은 세상이다.
밀밭의 좋은 씨앗인 밀은 천국의 아들들,
그리고 독보리인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가라지를 남몰래 뿌린 주인의 원수는 마귀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추수 때에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자들은 천사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 하나가 발견된다.
설명되지 않은 하나의 배역이 있다.
그것은 종들이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 하리라
(마태복음 13:30)
어쩌면 누군가는 종들이라 함은
추수하는 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할 테다.
물론, 얼마든지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들이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종들에게 이르는 주인이
‘추수 때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종들은 누구일까?
밀과 보리가 자라는 주인의 들판은 엄연한 ‘밀밭’이다.
주인이 뿌린 씨앗이 밀의 씨이기 때문이다.
밭의 이름은 주인이 뿌린 씨앗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제 아무리 마귀가 가라지를 뿌려대도
세상은 하나님의 밀밭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세상 자체이기도 한 프랙털로써의 나 역시
하나님의 밀밭이다.
그러므로 내 존재의 핵심,
인격의 중심인 마음은 하나님의 밀밭이다.
하나님의 밀밭인 나의 마음은
원래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였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일궈진
기름지고 좋은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악의 지각변동과 각종 재해들로 인하여
아름다운 대지는 파괴에 파괴를 거듭 당해왔다.
게다가 엔트로피의 지배로 인하여
갈수록 좋은 땅은 줄어들고 그만큼 메마른 길,
황폐한 돌무더기,
거친 가시밭들이 우후죽순 늘어만 갔다.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좋은 씨앗의 수확량이 급격히 감소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씨앗들을
나의 마음에 아낌없이 뿌리는 주인이시다.
사랑함에 있어서 도무지 포기란 걸 모르는 까닭에,
어디든 남아있을 좋은 땅에
씨앗들이 뿌리 내리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꺼이 좋은 씨앗들을 낭비하시는 것이다.
내 마음의 질이 어떤지 상관없이
내 마음은 무조건 밀밭이다.
주인께서 뿌리시는 것이 밀의 씨인 까닭이다.
물론, 몹시 애석하게도 밀과 함께
독보리가 자라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마귀가 몰래 침범하여
가라지를 흩뿌리기를 멈추지 않는 탓이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이렇듯 밀과 독보리가 함께 자라는 밭을 두고
주께서 ‘천국’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은 괴롭다.
날마다 밭에 나아가 싹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종은 고통스럽다.
밀보다 더 크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독보리를 견딜 수 없는 탓이다.
그리하여 그 종, 곧 주인의 밭을
의롭게 만들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자는
주인을 찾아가 여쭙는 것이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복음 13:28)
그러나 주인은 밭에 손을 대고 싶은 열망으로
쩔쩔매는 종들에게 찬물을 끼얹으신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태복음 13:29)
바로 그 종들이었던 때가 있었다.
내 안에서 버젓이 자라고 있던 불의와 불신,
연약함과 나약함이라는 독보리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가라지를 일괄적으로 솎아내어
모조리 불태우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주인께 매달리곤 했다.
그러나 주인은 한 결 같이 냉담할 뿐이셨다.
“참고 견뎌라.
네 안에 있는 나 역시 그것을 견디고 있으니!”
그 후로 지금까지
마음 밭에 엄연히 자라고 있는 독보리를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럼에도 두려운 일,
곧 나의 밭이 보리밭이 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독보리가 자라고 있기는 해도,
주인이 뿌리신 씨앗을 따라 내 마음은 항상 밀밭이다.
주인이 좋은 씨앗을 뿌리시는 한
나는 꾸준히 좋은 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가라지를 없애는 일에 혈안이 되어서
가라지에만 집착하는 일은 별로 없다.
오히려 좋은 씨앗들이
그에 합당한 좋은 열매를 맺는 일에 집중한다.
독보리의 집요한 훼방을
오히려 밑거름으로 이용하면서.
일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스캇 펙 오라버니에 의하면,
우울증 환자들의 인식적 특징은
부정적인 것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이는 자신에게는 나쁜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병
(공주병과 왕자병)의 영향이라고 했다.
나쁜 일(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개 고통스러운 일이기 마련인데)이 일어났을 때,
자신에게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나쁘고 부정적인 것만을 골라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집중하다가
결국 더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와중에 자기에도 있는
엄연히 좋고도 긍정적인 것들은
쉽게 간과되고 파괴된다.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나다.
꾸준히 어리석고, 게으르고,
연약하고, 안일하여서는 말이다.
꼼짝없이 독보리가 일으키는 설사와 구토,
그리고 현기증을 경험하는 일은 괴롭고 지긋지긋하다.
심지어 그것을 빌미로 마귀가 슬쩍 다가와서는,
사실 너는 밀밭이 아니라 독보리 밭이라고 속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마다
좋은 씨앗을 나의 마음에 뿌리시는 주님이시다.
그렇게 주인이 밀의 씨앗을 뿌리는 한,
나는 누가 뭐래도 밀밭이다.
천국이다.
누군가에게 생명의 빵이 되어줄
밀을 농사짓는 신실한 종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Feb. 27.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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