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시치시니라
(마태복음 9:34-35)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싶었다.
예수께서 날조된 해석으로
중상모략을 당하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거짓 뉴스의 진원지는 무려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유대 종교계의
명실상부 실세들 중 하나가 아닌가!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이단 사이비로 낙인이 찍혀 종교 재판을 통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러므로 자기입증 내지는 자기주장이라도 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드러내는 데 필사적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데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예수시다.
그래서 날조된 이야기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해지고 있는 동안에도
예수께서는 이전과 다름없이
자기 사역에 충실하셨던 것이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태복음 9:36)
바리새인들의 악의적인 공격 중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보신 것은 무리였다.
마땅히 봄직한 자신,
그러니까 자기안위가 아니라 무리를 보셨다.
게다가 그들을 불쌍히 까지 여기셨다.
선한 일들만 골라서 했는데도
인정은커녕 억울하게 모함만 당하는 자신이 아니라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
기운이 빠져있는 것을 보셨던 것이다.
연민의 감정이 밀려들자
예수께서는 속히 마음을 정하셨다.
결심은 주저 없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곧장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이 불렸고,
그들은 이인일조로 파송되었다.
물론, 빈손으로 보내진 않으셨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질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넉넉히 채워 내보내셨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 사역할 곳도
분명히 정해주셨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6)
#2. 예수께서 무리를 보게 하시고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떠나던 날,
그녀가 배웅을 나왔다.
공항까지 우리를 태워다주기 전,
집 앞에서 잠시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때였다.
그녀의 눈을 보고 만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과 절박함이 어려 있던 눈이었다.
측은한 마음이 산처럼 밀려왔다.
섣불리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기어코 담고 만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생각하고만 있던 것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불쑥 뛰쳐나왔다.
“기다려 주세요!
한국에서 정착하는 대로
에셀나무 모임을 온라인으로 시작할 테니!”
그 후로, 한국에서 정착하는 내내
꾸준히 괴로웠다.
거대한 아낙 족속 같은
각종 물가(物價)의 협박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반납한 채
묵상 작가라는 애매한 정체성을 오롯이 해야 하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 나는
오로지 나만을 오롯이 보길 원했다.
나만을 아낌없이 가엾게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보았던 그녀의 눈 때문이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 안쓰러운 눈망울을 보고만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책임지기 힘든 말을 내뱉은 내 입이 미웠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안 본 눈을 사고 싶어서
몇 달을 근면히 앓았다.
엎친 데 덮치는 일은 예사롭다.
얼마 전에 오래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근근이 교제를 이어오기는 했으나,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와 2시간 넘게 통화를 하면서,
나는 또 다시 보고야 말았다.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에 지쳐
기운이 빠진 그녀를.
세트 메뉴로 딸려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
덜컥 먹어버렸음은 물론이다.
연민으로 배가 부르자,
묵상 모임에 대한 말을 꺼내고 싶어서
입술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지 않은가!
모질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사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괴로웠다.
괴로운 중에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들을 본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
주께서 나로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목회자와 선교사의 아내들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나로 하여금
그들을 거듭 보게 하시고,
눈에 밟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 만에 만난 스캇 펙 오라버니가
영적 성숙에 대한 잔소리를
세련되게 한바탕 쏟아냈다.
주님의 사주를 받은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성경 묵상 모임인
‘에셀나무UA 온라인 모임’을
덜컥 개설하고 만 것이다.
시간은 어찌나 급히 도망치는지
뒤를 쫓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시작한 모임은 어느새 두 번을 지나
세 번째 예약 중이다.
그 와중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지체도 냉큼 입문을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꽁꽁 묶여있던 마음이
어느새 풀어져서는 편안해졌다.
어쨌든, 주도적으로 보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게 하시고,
그리하여 그들을 찾아가게 하신 분이
책임도 지실 것이 분명하니,
지속적으로 평안하기로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Feb. 18.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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