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 <현명한 피>를 읽고.
차라리 음산한 달이다.
은은한 달은 작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탓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생(生)에 예민했고,
그런 까닭에 구름에 가려진 한낮의 태양에게서조차
기어이 빛을 사냥하여 포식했던 것 같다.
대낮의 빛에 흠뻑 취한 달은
세상 캄캄한 밤에 광(光)을 발산하며 발광한다.
말하자면 그녀의 소설은
은막 위에 비친 영사(映寫)다.
영사된 달빛은 고딕적이고도 그로테스크하다.
가히 공포스럽고 기괴하고도 끔찍한 캐릭터와 사건들로
촘촘한 것이 그녀의 지면인 것이다.
톨킨햄은 작가가 짓고 세운 도시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의 아류로 보이는데,
방랑자와 불량배와 사기꾼과 살인자들의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비행, 일탈,
폭력과 사기가 넘쳐나가 하면,
비행(非行)은 단순히 청소년의 전유물일 수 없다.
꼭 한 번 등장하는 경찰관마저 비행 경찰관인 것이다.
그와 같은 톨킨햄의 부패 지수는
교회와 신학의 타락과 정비례한다.
톨킨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그저 거리의 부랑아일 뿐이다.
맹인인 척 하면서 복음을 팔면서 구걸하는 호크스와
이름과는 정반대로 안식이 없는
그의 딸 사바스(안식이라는 뜻)가 이에 해당한다.
그녀의 기괴한 행동은
사기꾼 아버지로부터의 유기(遺棄)를
기정사실로 꾸역꾸역 받아들인 결과물로 보인다.
한편, 종교 비즈니스에 능한 톨킨햄 사람들은
기발한 신학 아이템으로 수완을 부리기도 한다.
주인공 헤이즈가 주창한 ‘그리스도 없는 교회’를 이용해
한몫 잡아보려던 후버 쇼츠 같은 치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헤이즈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솔러스 레이필드를 선지자로 고용하고
본인은 스스로 그의 사도가 되어
헤이즈로부터 가로챈 ‘그리스도 없는 교회의 복음’이라는
해괴한 신학을 전파하면서 헌금을 챙긴다.
“들어보세요.
내가 새로운 교회에 대해 설교할 테니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없는
진리의 교회에 대해서 말이에요.
제 교회에 오신다고 해서 돈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곧 시작할 겁니다.”…
“나는 어느 곳이든 듣는 누구에게라도 말씀을 전할 겁니다.
애초에 타락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없었고,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도 없으며,
타락과 구원이 없었으니 심판도 없었다고 설교할 겁니다.
예수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 빼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필요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죄라고 부르는 것을 실행하여
자신이 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다.
-헤이즈의 말과 행동, 본서 중에서
주인공 헤이즈가 짓고 싶었던 것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척점에 있는 교회(!)다.
그래서 거짓말쟁이 그리스도를 토대로 세운 교회,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를 전파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타락과 구원 신학을
극단적으로 부풀려 장사를 해온 개신교회와
적면으로 싸우기 위해 스스로 타락함(간음과 살인)으로써
죄와 심판을 온몸과 마음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없는 교회는
시작도 되기 전에 자멸하고 말았다.
그것의 창시자가
감당할 수 없는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파괴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없는 교회도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 신학대로 사는데 실패함으로써
그것의 거짓됨을 증명하고 말았다.
그날 아침 에녹 에머리는
잠에서 깨어 그것을 볼 사람이 오늘 찾아올 것임을 알았다.
그의 피가 깨닫게 해 주었다.
아빠처럼 그도 현명한 피의 소유자였다. …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는 바로 에녹 안에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지식,
그의 안에서 큰 불안이 자라는 것 같은 끔찍한 지식이었다. …
아침 내내 그의 피는
오늘 분명 그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
에녹의 뇌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그의 피와 소통하는 부분인데,
판단하는 일을 맡지만 단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부분은 온통 단어와 숙어로 가득 찬 곳이다.
-본서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 교회, 죄, 심판, 구원과 같은 단어들이
부패한 톨킨햄에서 일상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말들은
죄인들의 입을 타면서 꾸준히 퇴색하고 타락해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말들이 가진 원래적 의미와
내재된 힘이 아예 없어질 수는 없다.
무뢰한들이 일부러 왜곡하고, 비틀고, 훼손하고,
깎아내렸어도 그 말들은 말하는 자들보다 무구하고 탁월하다.
그것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인간의 피다.
생명의 근원인 피 만큼은
그것의 거룩함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미련하나,
인간의 피는 현명하다.
말하자면, ‘현명한 피(wise blood)’란 타고난 본능적 감각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감(感), 곧 육감이나 직감 등이 이에 속하며,
계시나 예언 등은 이것을 통해 꾸준히 접선을 시도한다.
그렇게 작가의 캐릭터들은 현명한 피를 가졌음에도
어리석기를 꾸준히 선택하는 타락한 피조물들이다.
불쌍히 여길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종류인 것이다.
경험에 의한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 속에 종교의 씨앗을 뿌리셨다.
그러나 백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그 씨앗을 그의 마음속에서 잘 배양하지 않으며
따라서 때를 따라 열매를 맺지도 않는다.(시 1:3)
이뿐 아니라 어떤 이는
이 종교의 씨앗을 미신으로 표출시키고
또 다른 이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저버린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서
이렇게 떨어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경건을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1권 중에서
그리스도, 우리들의 왕께서
자비의 왕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인간의 피 안에 종교의 씨앗을 심으시고,
그것을 배양하시며,
때를 따라 마침내 열매를 맺도록 도우시니 말이다.
긍휼히 여길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니,
그리스도는 부정할 수 없는 긍휼의 왕이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타락한 인간 지성의 영악함과 의지의 악랄함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하게 보여주는(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서 오래 전 읽었던 애니 딜라드가 느껴졌다.
울며불며 불쌍하니 살려주라고 절규하는 어느 숙녀 옆에서,
덫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던 어여쁜 사슴(?)을
차갑게 응시하며 관찰하던 그녀였다.
추잡하고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면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그들이야 말로 센 언니들이다.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나로선
그와 같은 담대함이 외계어로만 느껴지나,
그분 안에서 그들과 내가 한 가지라는 사실에
문득 안도감과 고마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Jun. 26. 2020.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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