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레비-수쌍의 책, <비밀의 심리학>을 읽고.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알 권리’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내게 그것은 때때로 무자비하게 늑탈하는
폭력배와 다름없어 보인다.
그것과 동전의 양면인 ‘표현의 자유’에게서도
향기보다는 냄새를 느끼는 편이 되었다.
‘무지의 권리’, ‘침묵의 자유’는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밀’은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라는
양손에 붙들린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겠다.
그렇게 권리와 자유가 편만한 세상에
비밀을 파헤치고 폭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대가 완연해졌다.
환상은 현실을 즐길 수 있게 해주고,
각자의 방식대로 현실을 바꿀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자신만의 방식으로 놀이를 즐기는 아이처럼 말이다.
마술은 우리 자신의 조물주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큰 행복을 누리려는 우리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다. …
살아가는데 환상은 반드시 필요하고,
비밀은 그러한 환상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비밀을 밝히면 우리는 사실상 환상을 잃게 되고,
현실에 내재한 폭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에 이와 같은 비밀의 폭로는
다른 현실을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본서 중에서
<비밀의 심리학>은 비밀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세상을 향해 비밀의 필요성을 강하게 어필한다.
현실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비밀이 그려낸 환상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책에 등장하는 ‘비밀’의 연관 단어들은
환상, 무의식, 신화, 믿음 등이다.
이와 같은 ‘비밀 패밀리’는 ‘공개 패밀리’
곧 현실, 의식, 뉴스, 이성의 상대편이다.
양쪽 일가로 말할 것 같으면
한쪽이 다른 쪽에 우의를 점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반대쪽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반드시 함께 공존해야 하는 한 쌍이다.
젖가슴이 사라지는 것을 참아내기 위해서
젖가슴으로 놀이를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이는 언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언어를 즐기게 된다.
말장난, 이야기, 역할놀이, 거짓말, 비밀 등을 통해서 말이다. …
아이들이 무엇 보다 먼저 느껴야하는 감정은
자신이 가족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안정감이다.
이러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때
아이는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확신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고,
이러한 안정감은 아이가 가족적인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정서적 문제들, 즉 질투, 욕구, 기만, 사랑, 혐오 등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
가족의 안정성은 가족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허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
-본서 중에서
건강한 아이는 자라기 마련이다.
외면인 몸뿐만 아니라 내면인 마음 역시 무럭무럭 자란다.
마음의 토양은 안정감을 통해 비옥해진다.
가족 안에서 자기 위치(사랑받는)에 대한 확신이 있는 아이는
비밀을 땅에 심는다.
안정감의 지원으로 비밀은 환상의 싹을 틔우고,
아이는 환상을 통해 무의식과 교류하면서
가족이라는 난폭한(?!) 세상을 견뎌낸다.
가족은 여느 세상과 다르지 않다.
친밀한 관계를 가장한 갖가지 교묘한 정서적 폭력,
곧 시기, 질투, 미움, 차별 등이 가족 내에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 가족 공동체에게 이야기는 중요하다.
여느 세상처럼 공유하는 이야기(신화 혹은 말씀)로 인하여
구성원들 간에 끈끈한 유대를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이다.
거짓 자아는
자신만의 내면 세계,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비밀 공간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럴 경우에 아이는 단지 행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가장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감출 것도 없다. …
이제 더 이상 모든 책임은 환경의 탓으로 돌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 자신의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자아에 달려 있다.
-본서 중에서
마음의 밭에 비밀과 환상을 경작할 수 없었던 사람은
무의식이라는 창고에 그것들을 밀어 넣고 봉인한다.
마음속에서 심겨진 것들은 비록 침묵은 하고 있어도
언제든 언어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 창고에 처박아 둔 것들은 똑같이 침묵은 하고 있지만,
유산된 침묵이기에 언어로 생산될 수 없다.
내면 곧, 마음이 황량한 자들에게는 참 자아가 없다.
자아인 척 하는 거짓 자아가 있을 뿐이다.
참 자아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해
홀로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으나,
거짓 자아의 경우에게는 불가능하다.
거짓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저 행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금수와 다름없음이다.
그런 점에서 비밀이나 환상이 없는 자는
본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신화적 능력은 마음 밭에서 비밀과 환상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원천 기술이다.
신화적 능력을 가진 사람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을 재료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벼를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거칠고 야만적인 세상을 상대로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를 무기 삼아 끝까지 싸우며 진군한다.
개인적인 삶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심리 구조 속에 그 위치를 설정하고,
그 사건을 비밀로 할지 그렇지 않을 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내면의 한계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 …
비밀의 공간은 자아에 대한 지식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숨고 싶다는 의지가 공존하는 내면의 대화의 장소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공간은 자아를 위협적인 모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자신의 비밀을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지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위 사람들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
무의식을 통한 끝없는 심리적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다.
비밀의 공간은 현실에 내재된 실망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본서 중에서
산다는 것은 일면,
릴레이로 달려오는 사건들과의 연속적 부딪힘이다.
부딪힘은 쓰러짐과 부상을 유발시킨다.
몸져눕게 된 자들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사건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들은 누운 채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
내면세계의 구조를 재조정한다.
알릴 것은 알리고, 숨길 것은 안전하게 숨기면서
자신을 일으키고 보호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장소가 ‘마음’ 곧 비밀의 공간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힘써 지켜야 한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한 개인은
주변 다수의 편견이나 실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마음 안에 자신의 비밀을 수호함으로써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순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디드로(Diderot)의 정의에 의하면
건강은 장기들의 침묵 상태다.
그와는 반대로 질병은
비밀이 갑작스럽게 노출된 상태,
육체가 격렬하게 아우성치는 상태다.
-본서 중에서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이라니!
만성 방광염을 앓을 때마다
병이란 장기들의 거친 자기주장이라고 느꼈었다.
건강할 때 그들은 있으나, 없는 듯 침묵했었다.
하지만 막상 병이 들면 그들은 돌변하여,
내가 여기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고
고통을 통해서 소리치며 발광한다.
장기들의 거친 자기 항변이 나는 두렵다.
꼼짝없이 다 들어주지 않고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감추는 그 무엇이기 전에
자기 자신과의 은밀한 대화,
즉 내면의 깊은 사색의 결실이다.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따라,
그 비밀은 내면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될 수도 있고,
내면을 어지럽히는 박해자가 될 수도 있다.
-본서 중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공공연한 비밀이라니!
마음에 그분을 심고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중이다.
그렇게 그분과의 은밀한 대화를 통해 나는 온전한 내가 된다.
그분의 말씀은 나를 지키는 수호자이자,
나의 포도원(마음)을 헤치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내는 사냥꾼이다.
때때로 마음속 못돼 먹은 새들과 큰 돌들과 가시덤불이
비밀을 박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을 경작하는 농부가 누구신가?
무려 그리스도시도 아니신가!
신실하신 농부덕분에 내 마음은 기어이 비옥해질 것이고,
비밀은 마침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자랑할 것이다.
비밀을 자랑하다니!
할렐루야다!
#May. 15. 2020.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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