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을 읽고
대충 읽었다.
재미가 없었던 까닭이다.
아니, 어쩌면 대충 읽어서
재미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서의 지루함을 타이밍 탓으로 돌렸다.
현실과 가상현실, 진짜와 가짜, 원본과 위본 간의 다툼이
내게는 의미 없어진지 이미 오래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것은
수렵 채집 시절에 즐기던 일종의 놀이였다.
진위 분쟁은 열정과 논리의 놀음이었는데,
모든 놀이가 그러하듯 그것 역시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불꽃처럼 집중적으로 타올랐다가
한 순간 가뭇한 흔적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것이리라.
암튼, 소설이 처음 나왔던 2001년에만 읽었어도,
이렇게까지 대충 재미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문학계의 전설,
작가 이상에게 설마 관심이 없었을 리가!
(그러고 보니 첫 단체미팅에서 만났던 남학생과
밥을 먹었던 곳도 ‘오감도’였지 아마.ㅋ)
그의 작품의 난해함은 신비주의라는 연막을 물씬 피워 올렸고,
그것이 지적 호기심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은
다른 대상을 향해 빠르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반면, 작가 김연수는 달라서,
이상에 대한 호기심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래서 이상에 대해 간절히 읽고 싶었던 이야기를 읽기 위해
본인이 직접 쓰는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소설은 총 3부로 안정감 속에
다채로운 함의를 지닌 구조를 선택했다.
1부는 이상의 데드마스크 진위 문제에 대해,
2부는 진짜 이상의 발자취를 따라
성지순례를 하는 가짜 이상 서혁민에 대해,
3부는 <오감도 시 제 16호 실화>의 진위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1부와 2부와 3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에 등장하는 소재와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고 중첩되면서
이야기에 부피와 질량, 높이와 깊이, 원경과 근경을 부여한다.
입체적인 이야기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의미를 생산하는데,
그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소설이 다루고 있는 인물이나 소재와 주제는 퍽 익숙한 것들이다.
인간 김해경, 작가 이상, 이상의 문학 작품들, 진본과 위본들,
이상의 카피캣, 설전을 벌이는 이상 문학 연구가들,
이상의 작품과 유품으로 돈을 벌려는 소장자들,
그리고 이상의 뉴스를 만들어 파는 문화부 기자들.
기독교에 오래도록 삶 전체를 푸욱 담근 채 살아가고 있는 내게는
소설 속 그것들을 치환할 만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나사렛 예수, 주 예수 그리스도, 구약과 신약, 정경과 위경,
원본과 사본, 예수의 카피캣(사도들과 교부들을 비롯한 지금의 나까지),
역사상 수도 없이 존재해왔던 신학자들,
각종 성지순례 여행상품과 기념품 제조 판매자들, 그리고 기독교 언론들.
성경이 일면 엄연한 문학이라는 사실로 인해,
소설의 내용이 나의 종교와 상당히 맞닿아있는 것이겠다.
“문제는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는 것이죠.
보는 바에 따라서 그것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 문학을 두고 최재서와 김문집이 각각 다르게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상과 관련해서는 열정이나 논리를 뛰어넘어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란 말입니다.
진짜라서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진짜인 것이고
믿기 때문에 가짜인 것이죠.”
-본서 중에서
이미 신화의 반열에 오른 것은
합리적 이성과 구체적인 경험 안에 가둘 수 없다.
그것은 이성과 경험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믿음의 대지를 뛰어다니는 종류인 것이다.
신화의 반열에 올라 신앙의 대상으로써
믿음이라는 신비로 다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이상과 그의 문학 작품에 대한 진위 논란은
저급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나의 종교는 이상과 닮아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성령과 교회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히 듣는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면서
매일을 살아낸다.
그렇게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중이다.
그것이 외로운 이상의 독자(讀者) 서혁민과
교회와 함께하는 성경의 독자(讀者)인 나의 차이 되시겠다.
(소설을 읽고서 신앙고백을 하게 될 줄이야!;;)
<꾿빠이, 이상>은 처음 읽은 김연수의 소설이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침 그 서점에 있던 것이 이것뿐이었던 것이다.
나로선 최선이었다.
그러니 후회는 없고, 다음 기회는 모르겠다.
은혜가 허락된다면이야!
#May. 30. 2020.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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