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브루그만의 책, <브루그만의 시편 사색>을 읽고.
구약성경이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경배이다.
-본서 중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들 중에 책이 있다.
모든 인연이 그렇듯, 책들 중에도
쉬이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실존과 꼭 맞물려
귀한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유용한 지식, 절실한 위로와 필요한 격려, 뼈아픈 훈계,
그리고 적절한 삶의 이정표를 선사해주었던 고마운 벗들.
그리고 이제 <브루그만의 시편 사색>이다.
그는 이제로부터 귀한 인연으로 기억될 참이다.
내 신앙 여정의 조감도를 보여준 고마운 동료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분명 슬픔을 당한 이웃과 함께 법정에 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본서 중에서
즐겨 읽고 불러왔던 시편은
그동안 내게 꾸준히 어려웠던 책들 중 하나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아니 궁금했기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이유가 알려져 왔다.
<브루그만의 시편 사색>에 의하면
나는 개인적인 로맨틱한 경건(로고스씨와 연애하기)에
편향되어 있는 부류다.
그래서 시편을 온전히 누리지 못해온 것이었다.
시편은 개인 경건과 함께 공동체 신학이라는
두 기둥으로 세워진 말씀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경건에 편향된 자는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서, 힘에서 힘으로
그리고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는 것을 추구하면서
어둠과 혼미(disorientation)에 관한 목소리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시편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처사이다.
-본서 중에서
책의 전체 얼개는 삼 대지 구조로 되어 있다.
150편이나 되는 시들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기 위해
구약 신학자인 저자는 세 개의 카테고리로
시편을 나누어 묶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삼 대지는 정위(定位)의 시편(Psalms of Orientation),
혼미(昏迷)의 시편(Psalms of Disorientation),
새로운 정위(定位)의 시편(Psalms of New Orientation)이다.
이는 몹시 익숙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진부하게 느껴지는 얼개(정-반-합)인 것이 사실이나,
삼각형 구조가 야기하는 큰 장점인 안정감은
이 형식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애용하게 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새 예루살렘에 대해
자유롭게 소망을 품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 바로 이 수용력이었을 것이다.
-본서 중에서
신학자로서 저자는 시편에 대한 ‘비평이후적 읽기’를 추구한다.
즉, 그동안 시편을 연구해온 학자들이 만들어낸
비평적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시편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다.
특별히 저자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활용할 세 가지 도구를 소개하는데,
그것은 헤르만 궁켈의 양식 비평, 모빙켈의 제의적 가설,
그리고 베스터만의 시편 내의 문학적 역동성이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도구들은 시편 연구에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공헌을 한 도구들이고,
게다가 비교적 검증되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평적 도구들로 여겨져 부담이 전혀 없었다.
(참고로, 스스로를 보수주의적 신학을 가진 자로 분류한
책의 번역자는 이들 도구들이 수용하기 어려웠다고
‘역자 서문’에서 고백했다.)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부재 속에서조차 하나님께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서 중에서
푸념이나 불평은 낯선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오랜 상호작용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지금까지 내 신앙의 여정은 진행되는 동시에 반복되어 왔다.
그것의 시작은 모든 것이 명쾌한 질서로 확립된 정위에서부터다.
정위의 세상 속에서 젊은이는 그것을 배우고 따르도록 교육받는다.
그렇게 정위가 그럭저럭 마련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실존의 반격이 본격화 된다.
정위는 혼미의 상황 속에서 흔들리고 무너지고 전복된다.
기존의 정위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젊은이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다 기어코 정위가 무너지고 나면,
정위의 폐허 속에서 젊은이는 선택을 해야 한다.
기존의 정위를 버릴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기존의 정의를 다시 붙들 것인지.
폐허를 버린 자는 전혀 다른 세상에 편입하게 되고,
폐허의 파편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자는
결국 새로운 정위를 세우게 된다.
그렇게 신앙은 세워진 정위들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전복되고 다시 세워지는 끊임없는 과정들이다.
새로운 삶이란 토라에 대한 순종이 진정한 기쁨인 그런 삶이다.
-본서 중에서
야웨의 경이로움과 이 시편이 전하는 소식은
이스라엘이 또다시 듣는 자리로 초청되었다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지난 케냐에서의 5년은 오롯한 혼미(Disorientation)의 시기였다.
인간의 하위단계의 욕구인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가 모두 박탈된 환경에 처하게 되자
그 때까지의 정위, 곧 나의 신학이 뿌리째 흔들려 전복되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결코 이전의 반짝이고 질서정연한
정위(한국이나 미국에서 배웠던)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선택한 것이겠다.
어떻게든 새로운 정위를 세워, 새 노래로 찬송하기 위해
이곳으로 기꺼이 내몰린 것이겠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곳에서는,
인간의 삶도 값싼 것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삶이 값싼 것이 되어버리는 곳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도 알려지지 않게 될 것이다.
-본서 중에서
이 책과 더불어 일전에 읽었던 월터 브루그만의 세 책,
곧 <예언자적 상상상력>, <시편의 기도>,
<안식일은 저항이다>가 공히 좋았다.
그의 책들은 신학자의 책답게
구조와 구성이 안정적이고 명쾌하여
독자로 하여금 지금 읽고 있는 대목이
정확히 어느 부분인지 길을 잃지 않게 해준다.
이는 그가 분명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소개할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신학적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문장들의 함의가 풍부한데, 저자는 언어를 창의적으로
조합해 내는 시인의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좋게 보이는 것은 저자에게는
주변인들에 대한 관심과 긍휼의 마음이 있다.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저자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의 신학 책에서 덜컥 위로를 받곤 했다.
야웨의 특별한 성향은
마음이 상한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고
상한 심령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즉 야웨의 연대는
성공에서 성공으로 줄기차게 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며,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시편은 토라의 지배를 받는 자의 인생의
구체적인 상황과 체험의 결들 속에서 피어난 다채로운 꽃들이다.
찬양, 감사, 지혜, 훈계, 탄식, 원망, 불평, 분노, 기쁨, 슬픔,
낙망, 무기력, 회복, 상처, 치유, 초연, 초월, 내재,
창조, 구원, 추락 등의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시편을 아름다운 동산으로 지어내고 있다.
새로운 정위는 약한 자들조차도
강한 자들을 통해 유린당하지 않는 권리를 갖는 그런 세상이다.
-본서 중에서
어느새 40대 중후반이 되어 버린 나이.
더해져 가는 나이가 주는 득과 실은 확연하다.
이 와중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은 것처럼 느껴져
억울함이 성취의 만족을 쉽게 따돌리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따라 개인 경건을 넘어서서
공동체 신학 곧 사회 정의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몹시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시편의 꽃들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이해하고, 친밀하게 소통하고,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편의 동산을 능숙하고 만족스럽게 누비고야 말 것이다.
시편은
공의와 의로움이라는 이슈에 직면하지 않는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은 거의 아무것도 아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서 중에서
#Nov. 18. 2019.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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