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워드 그리핀의 책, <블랙 라이크 미>를 읽고.
대부분 백인이었다.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을 표방하는
학교나 교회들은 늘 백색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케냐, 우크라이나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백인은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서도 본인이 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에
이르기 까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예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만 인터내셔널이지
하얀 도화지에 노랗고 까만 점이 더러 보일 뿐이니,
비례 대표 원리에 따라 백색 리더십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터내셔널’을
고집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전 인류적 가치인 인간 평등과
집단적 공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포장하고 싶은 것이다.
<블랙 라이크 미>에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인간성 면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피부색이나 철학적으로 ‘우연한 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미친 상황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본서 중에서
미국인 존 하워드 그리핀은
인종차별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1959년 어느 날,
흑인이 처한 실존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벼운(?!) 인카네이션을 감행한다.
의료 기술(약과 방사선)과 메이크업의 도움을 받아
흑인으로 변장한 후,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의 딥 사우스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지역을 3주 정도 여행한 것이다.
이 모험을 통해 그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편견
즉, 흑인은 성적으로 난잡하고, 지적 능력이 결핍되어 있어서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선입견이
매우 부당한 것이며, 어떤 백인도 흑인과 같은 실존에
처해진다면 현재의 흑인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순전히 공포의 전율 속에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딕 그레고리에게 이 얘기를 하자 그는
“이게 바로 우리가 말했던, 그 이빨이 덜덜거리는 용기라는 거요.”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이런 종류의 활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단순한 기술을 익혀야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과 신경체계가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우리 의지는 ‘해야 해’라고 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이 같은 도전과 모험은 이후 잡지와 책으로 출간되었고,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방영되고 개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저자와 그의 가족들은
백인들 사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집단적 괴롭힘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에 대한 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작가 개인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외국(!!) 생활을 경험하고,
나치와 맞서 싸우다 실명한 뒤,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10년 만에 시력을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인종 차별에 맞서 평등과 공평, 사회 정의 구현을
소명을 받아 버린 것이다.
“이들(솔로몬 제도의 사람들) 문화에서 볼 때에
나는 꼬마 아이의 도움 없이는 혼자서 살아남을 수도 없는 어른,
즉 열등한 존재다. 지역 주민의 시각에서 볼 때
나는 ‘타자’고 열등한 존재며, 그들은 우월한 존재다.
게다가 이들의 시각은 타당성을 지닌다”
-본서 중에서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여간 불편하고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것이 주체에서 타자로의 이동을 경험케 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제아무리 유명한 박사 학위를 가져와도,
현지에서 그것은 화장실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몹시 아프고 비참하게 하는 것이나,
겸손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특별한 자유를 선사해주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편견은 나이든 사람에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배우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사회 전체의 주입 과정 속에 젖어서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 갇혀 있는 무의식적인 의사소통 환경에서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눈이 멀어버린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대에 인종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이렇게 부정하는 동안에도
조직적인 과정은 영원히 고착된다.
-본서 중에서
나고 자랐던 한국에서 나는 주변인일 수 없었다.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소설이나 드라마를 볼 때 나의 관심은
예외 없이 주인공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반면, 내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주변을 맴돌았다.
하영양의 경우 한 결 같이
주인공보다 서브 남주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하진군의 경우, 애니메이션 ‘카(Cars)’를 보고 난 후,
자동차 장난감들을 모을 때 주변 캐릭터들부터 손에 넣었다.
주인공 라이트닝 맥퀸을 가장 나중에 합류했었다.
‘뽀롱뽀롱 뽀로로’에서도 뽀로로가 아니라
그와 동거하는 크롱을 하진군은 제일 좋아했었다.
그동안은 이와 같은 차이를
그저 성격이나 기질의 탓으로 돌렸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이것은 서로 다른 사회·문화적 경험이 만들어낸 차이였다.
미국, 케냐, 우크라이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또 보내는 중인 내 아이들은
한 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늘 주인공 옆에 있는 주변인이었다!
십년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퍽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은 아니다.
작가는 애초에 주인공들에게 평안한 삶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애써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서는
고통과 아픔의 연속을 살아가기 보다는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 위로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이 평강하게 살았으면 하는
어미의 나이브한 마음의 발로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의 종교성에 대해 토론했다.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입에 올리며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지 말해 주었다. …
수사가 웃으며 말했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죠.
'잘못을 저지르는 바보는 저마다 자기 행동을 뒷받침해줄 구절을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요.
신앙심이 있으면서도 편협한 사람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었던 거죠.”
-본서 중에서
식민지 정책, 노예제도 등 반인륜적인 정책이나 제도들을
지지하고 지원했던 신학자들과 신자들은 항상 있어왔다.
그들은 하나님이 흑인을 저주해서
얼굴색을 검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흑인에 대한 가혹한 처사를 정당한 것으로 옹호했다.
자기 기득권을 보수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성경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곡해하여 유용(流用)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신앙인이라는 가면을 썼을 뿐
자기 뜻에 하나님의 뜻을 굴복시키는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세상은 지독한 차별과 불공평 위에 세워졌다.
기득권을 가진 부자(돈, 권력, 명예를 독점하고 있는 자)는
불공평한 특권을 보장하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열렬히 옹호한다.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오직 가난한 자들이다.
그래서 기존의 질서를 개혁하는 일은 극히 어렵다.
더러 부자들 중에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드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면 부자들은 그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은 후,
교묘하고도 강력하게 보복하여 매장시켜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헛될 수 없다.
그들이 흘린 피를 받은 땅이 공의의 하나님께 호소하기 때문이다.
때가 이르면 공의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나처럼 검은’ 사람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Human Like Us)을 의미한다.
-본서 중에서
이 책은 ‘인종인지 감수성’
혹은 ‘차별인지 감수성’에 예민해질 것을 권고한다.
약자, 주변인, 하층민, 가난한 자들은 살아오면서 받아온
숱한 상처로 인하여 인종과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다.
살짝만 건드려도 발끈하며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감수성을 힘써 길러야하는 쪽은
강자, 주인공, 상층민, 부자들이다.
그러나 애석한 일은 그들이 주변으로 추락하고
내몰리는 경험을 해보지 않는 한,
그와 같은 감수성을 획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을 가리켜 인카네이션이라고 한다.
인간의 그러함을 직접 경험하시고,
그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카네이션을 감행하셨다.
오직 사랑의 이유로 말이다.
오직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위한 공의를 이유로
일종의 인카네이션과 같은 고통을
지금도 겪고 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대림절의 축복이
특별히 충만하길 간절히 바라며 마친다.
#Dec. 18. 2019.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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