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혈질과 결혼한 우울질
고유의 특질은 변할 수 없다.
변질 된다면 애초에 그것일 리가 없다.
우울질은 내 고유의 기질이다.
그것을 기본으로 점액질, 담즙질, 다혈질이
각각 다른 점유율로 섞여 내가 태어난다.
만나는 상대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수많은 내가 탄생함은 물론이다.
까다로운 우울질에게
받는(receive) 것은 쉽지 않다.
특별히 원하지 않는 것이 주어질 때는 더욱 그렇다.
오래 전 어느 날,
원치 않았던 옷 보따리 두 개가
좁은 거실 한 귀퉁이를 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자기가 입던 비싼 옷들이라면서
그녀가 안겨주고 간 것이었다.
‘그렇게 비싸고 아까운 걸 왜 나한테 버리는 거지?’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억지로 우울질에게
무언가를 안기려는 사람은 기억해야 한다.
그런 행동은 그를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는 것임을.
결국, 우울질은 불쾌한 마음으로
그녀의 배설물들(!)을 깔끔하게 도네이션해 버렸다.
우울질이 정반대 특질인
다혈질에 끌린다는 속설은 내 경우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우울질들에게 끌리는 나다.
우울한 기질이 싫지 않은 것이다.
내게 다혈질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은 즐거워도,
깊이 관계하는 것은 피곤한 상대다.
상황을 분석하고, 예측하여,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에게
충동적인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시끄러운 외계인일 뿐이다.
나의 장기에서 추출된 우울질 한 방울을
검지 위에 올려놓고 엄지로 문질러본다.
<부정적인, 회의적인, 의심 많은, 비판적인,
미리 걱정하는, 과민한> 성분들이 손가락에 번진다.
문득 그분에 대한 퍽 불편한 감정이
단전으로부터 끌어 오른다.
그분은 때때로
다혈질의 옷을 입고 내게로 오셨던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은
언제나 수많은 환자들로 북적거렸다.(요 5:2-8)
연못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못 속에 들어간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 의원, 저 의원을 전전해도
별 차도가 없었던 오래 묵은 병자일 경우에는
간절하다 못해 강박적이었다.
언제 연못물이 움직일지 몰라
연못에 주변을 떠날 줄을 몰랐던 것이다.
38년 된 병자의 경우가 그랬다.
연못에 일등으로 뛰어들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등은 언제나 다른 병자들의 차지었고,
그는 이등에게 주어지는 부상(副賞)인
상대적 박탈감과 원망을
마음 한 칸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그러다 급기야 그의 삶의 목표는 수정되고 말았다.
연못에 일등으로 들어가기에 밀려
병 나음은 부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
영광의 형상이신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수많은 병자들 중
단 한 사람, 38년 된 병자를 보셨다.
그리고 오직 그 한 사람만을 고쳐주셨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야무지게 따지는 우울질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 낭비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주님 정도의 능력이라면
베데스다를 거점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사역을
화끈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우울질 제자들은 애꿎은 혀만 끌끌 차댔다.
예수님: (상대의 짙은 병색을 안쓰러워하시면서)네가 낫고자 하느냐?
38년 된 병자: (분한 마음으로)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 (선문답을 하듯)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우울질이 구시렁거린다.
‘이왕 고쳐주실 거면
그냥, 병자가 원하는 대로 일등을 만들어주시지.
그러면 안식일 논쟁에서 살짝 빠질 수도 있으셨을 텐데.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병자들에게도
기회를 베풀어주시면 좀 좋아.’
충동적으로 일하는 듯 보이는 주님이
우울질은 못마땅하다.
생동감 있고, 쾌활하고, 사교적이고, 매력 있고,
활기를 주며, 열정적이고, 인기 있는 다혈질 주님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충동적인 면에서 우울질은 움찔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단 하나의 사실을 빌미로
다른 백가지 좋은 점들을 폄하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우울질이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아 3:1-2)
나의 신랑, 나의 주님은 가끔씩 다혈질이시다.
종종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다혈질과 결혼한 우울질은 곧잘 놀라고,
줄곧 혼동스럽고, 매번 눈물을 쏟는다.
찾아도 찾을 수 없고,
꼼꼼히 따져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분인지라
우울질은 매양 당황스럽다.
그러나 우울질은 알고 있다.
신랑의 예측할 수 없음이 신비요,
충동적임이 섭리와 은혜라는 사실을.
계획하고, 계획을 따라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자기 안전을 보장하려는 헛수고라는 사실을
우울질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혼할 생각이 없다면,
신랑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신랑과의 여정이 다소 멀미가 나고,
종잡을 수 없는 것 투성이여도
그를 믿고 끝까지 따라가 볼 일인 것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25. 2017. 사진&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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