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아귀까지 채우니

창고지기들 2017. 1. 14. 03:42






아귀까지 채우니




#1. 하인들의 증언



특별하지 않은 혼인 잔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혼인 잔치는 유난했다. 

잔치의 꽃, 포도주가 성급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급조할 뾰족한 수도 없었으니, 

잔치는 무르익기도 전에 파장(罷場)날 판이었다. 

하객이었던 그분의 말씀이 문득 당도한 것은 

두고두고 얼굴을 붉힐 가문의 수치가 

막 탄생하려던 때였다.



예수께서 그들(하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 2:7-9)



하인 1; (머리를 긁적이면서)  처음엔 ‘하객들이 더 오시려나?’ 했었습니다. 

            이미 오신 손님들로 항아리의 물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으니까요. 

           손님이 좀 더 오시면 정결 예식을 위한 물이 필요할 테니, 

           저희는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돌 항아리의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인 2; (팔짱을 낀 채)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늘 하던 일이니까요. 그런데 다음 명이 좀 이상했습니다. 

            아귀까지 채운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알기로 연회장은 이미 정결 예식을 마친 상태였는데 말입니다.



하인 3;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기는 연회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떠다 준 물을 대뜸 마셨으니까요. 

            (얼굴을 찌푸리며)으윽, 씻는 물을 마시다니요! 

            ‘이 양반이 벌써 취했나?’ 했었습니다.



하인 2: (박수를 치면서)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만 요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 2:10)라고 했습니다. 



하인 3: (놀라는 표정으로) 맞아요! 

            떠다 준 것은 분명히 물이었는데, 

            연회장은 그것을 좋은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하인 1: (몸을 앞쪽으로 구부리면서 속삭이듯) 하도 이상해서 

             저희도 떠온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살짝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정말 포도주더라고요!



하인 2: (고개를 끄덕이면서) 극상품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도주인 것만은 확실했어요. 

             맹물이 순식간에 포도주가 되다니, 그런 일은 난생 처음 겪었습니다.





#2. 나의 증언



잔치가 파장 나는 것은 그분의 뜻이 아니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 내 몫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일이 

잔치를 위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객들은 이미 정결 예식을 끝낸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물을 길어다가 항아리를 채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하찮은 일이었고, 

내 딴엔 퍽 지루하고 고단한 일이었다. 

일이 서툴렀던 탓에 

항아리 아귀까지 물을 채우는데 꼬박 4년 반이 걸렸다. 



“출판은 시인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말은 옳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 시인은 그저 시를 쓸 일이다. 

출판은 오롯이 출판사의 몫이다. 

그들은 연회장처럼 맛본 시를 출판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배포한다. 

까다로운 연회장의 입맛에 맞아야 

비로소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귀까지 채운 것은 분명히 맹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맛본 출판사는 냉큼 출판을 해주었다. 

그들에게 건네지는 순간 포도주가 되었던 것이다. 

포도주로 둔갑한 나의 맹물을 맛본 소수의 사람들이 

그분의 잔치를 잠시 즐겼다.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Jan. 11. 2017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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