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조의 재료
의학, 심리학, 교육학 등에서는 흔히 장애를 문제로 여긴다.
문제 앞에 선 전문가들은 자동반응을 한다.
원인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원인이 밝혀지면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통념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사회적 통념을 따돌리셨다.
장애를 문제가 아닌 창조를 위한 재료로 새롭게 바라보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일행은 길에서 한 맹인을 보았다.
그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제자들은 그의 장애를 재빨리 문제로 축소시킨 후,
그것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예수께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장 3절)
이후 예수께서는 맹인 앞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명명하셨다.
그러고 나서 맹인에게 시력을 창조해주셨다.
문제로부터 그 사람의 장애를 구해내신 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도구로
새롭게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맹인의 창조된 시력을 통해
본인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증거 하셨다.
문제의 손아귀에 억류되어 있던
병, 장애, 하자들에게 탈출구가 열렸다.
이제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언어적 어려움들은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창조의 재료가 된다.
그러므로 풀리지 않는 문제로 인하여
애써 고통 받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문제를 창조의 재료로 바라보시는 창조주께 가지고 가서,
그것을 그 분께 제물로 올려드릴 일이다.
병, 장애, 하자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그 분을 바라고 소망할 일이다!
#2.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
전에는 맹인이었지만,
이제는 아닌 한 사람이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 때문이었다.
안식일 법에 따르면 그 날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굳이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셨다.
그가 굳이 그리 하신 이유는 분명했다.
그 날이 창조된 모든 생명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날이자,
생명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날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꼬투리를 잡고자 혈안이었던
바리새인들 앞에서 자초지종을 밝혔다.
그의 설명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예수는 죄인이다!를 주장하는 편과
죄인은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다!를 주장하는 편으로 말이다.
두 편의 의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그들은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소환해서
그가 정말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를 물었다.
부모의 대답은 예스였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질문은 아들에게 토스하며 회피했다.
바리새인들의 힘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시 사건이 미결되자
그들은 다시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소환했다.
그는 그의 부모와는 달리 용기 충천하여 고백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한복음 9장 31-33절)
듣고 싶은 대답은커녕 오히려 본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고백을 한 그를 바리새인들은 결국 쫓아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어떤 신도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공공연히 했다.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전에 나는 환경주의자, 실용주의자, 성취주의자였다.
그리고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정상인이 되었던 것처럼
지금 나는 선교사로 창조되었다.
이제 나는 환경주의자도 실용주의자도 성취주의자도 아니다.
선교사로서 내가 하는 일은 견디는 것이다.
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여건의 불안정함과
커다란 문화적 차이와 함께 이전의 나를 견디고 있다.
이전의 나는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지금의 나를 괴롭히곤 한다.
무능력하고 쓸모없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다그치는
이전의 나를 견디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견딘다.
사랑의 제일 되는 덕목인 오래 참음을 살아간다.
이전의 나의 위협이 포효하는 뱅갈 호랑이 같이 무서워
쩔쩔 매면서도 나는 애쓴다.
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도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이전의 나와 맞서서,
그 분의 법을 지키는 것이 참 인간의 몫임을
끊임없이 선교 하고 있다.
그렇게 전에 환경주의자, 실용주의자, 성취주의자였던 나는
선교사가 되어 그 분을 고백하면서
오늘도 견디는 중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Feb. 9. 2015.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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