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의 하영양만 했을 때,
등교 길에 자리하고 있던 농가가
무질서에게 야금야금 먹히는 모습을
매일 지켜보면서
나는 열역학 제 2 법칙을 직감했다.
관찰을 마친 후, 사춘기였던 나는
비통한 심정으로 산문을 하나 썼는데,
신의 질서 정연함과
인간의 무질서함을 대조하면서
인간 행사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치기 어린 글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기성세대에 대해 NO! 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자신을 주장하는,
말하자면 사춘기스러운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대를 주름잡고 있는 사상인
휴머니즘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저자 존 그레이가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은 다윈주의다.
다윈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되,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우연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 사상을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을 따와
인간은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일 뿐이라는
비유로 풍성하게 살을 붙인다.
(이 책의 원제목은
‘Straw Dog: Thoughts on Human and Other Animals’ 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천지가
한 때(!) 재밌게 가지고 노는 추구일 뿐이며,
때가 지나고 나면 추구처럼 길바닥에 버려질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게다가 인간이 추구처럼 버려지고 나면
천지는 다윈주의에 입각하여
또 다른 우연의 산물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또 다른 추구로 삼을 것이다.
이 때 저자는 인간 이후에
천지에 득세할 우연의 산물의 후보로
인간이 만든 테크놀로지
곧,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를
조심스럽게 추천하기도 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저자는
휴머니즘을 공격하되,
휴머니즘이 숙주로 삼았던 기독교와
휴머니즘이 기생하고 있는
진보주의와 과학주의도
아울러 비판한다.
#3.
저자는 휴머니즘을 종교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을 끌어내어 낸 후,
그 자리에 인간을 주입하여
인간 종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윈주의의 진화를
진보와 같은 것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진보주의(유토피아)를 가져왔으며,
과학을 시녀로 삼아
인간 종의 진보를 위하여
자연을 학대하고 약탈함으로써
오히려 자기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란 말은
바로 여기서 탄생한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라는 말에
약탈하는(rapacious) 이란 말을 삽입하여
신조어 호모 라피엔스(약탈하는 인간)를 만들었다.
즉, 저자는 휴머니즘의 대척점에
‘호모 라피엔스’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하찮은 우연의 산물인 인간은
그 특유의 약탈성으로 인하여
결국 유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저자가 쇼펜하우어를
어여삐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자가 헤비급 챔피언
휴머니즘을 맞이하여
선택한 전략은 아웃복싱이었다.
가벼운 잽으로
득점과 연결되는 포인트를
스피디하게 공격하여
판정승이라도 얻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저자는
상대를 마음대로 요리하기 위하여
머리와 팔, 다리, 그리고 내장을
자르고, 드러내는 ‘축소화’를 사용했다.
물론 비판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한계를 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 진영에서
한 방향으로 오랜 순종을 하고 있는 나조차
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독교를
휴머니즘의 숙주로 지나치게
축소화(도덕주의 등으로)시킨 것은
치기어린 태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4.
휴머니즘을 허무는 저자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은
볼멘소리로 던져질 만하다.
하지만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런 질문은 사절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삶의 목적이 행동에 있다고 가정하는
위와 같은 질문은 휴머니즘(근대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삶은
과학과 기술을 한껏 활용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온전한 정신을 주리라는 환상에는
굴복하지 않는 삶이다.
평화를 추구하되,
전쟁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은 갖지 않는 삶이다.
자유를 추구하되,
자유라는 것이
무정부주의와 전제주의 사이에서
잠깐씩만 찾아오는 가치라는 점을
잊지 않는 삶이다.
좋은 삶이란 진보를 꿈꾸는데 있지 않고,
비극적인 우연성을 헤쳐 나가는 데 있다.”
나아가 저자는
진보와 행동과 의미를 추구하게 하는
휴머니즘에 반해서
놀이와 관상(觀想)과 영적인 삶을 주장한다.
(영적인 삶이란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삶이 아니라
의미에서 놓여나는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저자와
기독교인인 내가 서로 포개진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축소화시킬 때,
기독교의 세 기둥 중에서 구속만 남기고,
창조와 타락은 제거했다는 증거이리라.
#5.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다른 복음들(휴머니즘, 진보주의, 자본주의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경계하고, 대적하는 중에
휴머니즘과 싸우는 철학자 존 그레이를 만난 건
분명 유익한 일이었다.
게다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에서
파편적으로 흩어지고 숨어 있는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또한 재미있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윤리를 실질적인 삶의 기술이라고 보고,
그것을 도교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사실 성경의 잠언은 지혜서로서
이 때 지혜란 삶의 기술을 의미한다.
게다가 잠언은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나는
의식, 정체성, 인간의 존엄성 등이
모두 환상이고 가짜라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저자가 진화론을 믿듯이(!),
나는 인간의 의식과 정체성과 존엄성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인간을 만들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하찮고, 약탈적이라는
저자의 말은 일정수준 이상 동감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다윈주의를 믿듯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천지가 어질지 않다는(우주의 원리)
저자의 말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성경이 그 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Apr. 20. 2014.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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