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핀클의 책, <예술 도둑>을 읽고.
보물 상자 안에 사는 삶이라니. -본서 중에서
적당한 제목이다. 브라이트비저는 예술품 도둑이 아니라 예술 도둑이다. 그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예술품을 훔쳤다고 고백했다. 돈과 교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다락방의 빈 공간과 함께 공헌한 마음을 아름다움으로 채우기 위해서 도둑질을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아름다움을 담지하고 있는 예술품을 감옥과 같은 박물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려고 도둑질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술품이란 모름지기 여러 박물관들을 전전하기 마련이고, 잠시 머물다 떠나는 수많은 스테이션들 중 하나로 자기 다락방에 들여와 감상자인 자신과의 인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예술품을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괴변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해 못할 것도 없는 얘기다.
모네의 <수련 연작>, 로제티의 <레이디 릴리>, 남계우의 <호접도>, 김두량의 <월야산수도>, 김수철의 <연꽃> 등이 걸려있는 보물 상자 같은 집에서 사는 상상은 나도 해봤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도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는 물론 아찔한 황홀감으로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따라 예술품에도 먼지는 쌓일 테고, 그것은 기어이 심미적 감각을 무뎌지게 만들 것이다. 일상에 들인 아름다움은 낯설게 하기를 제 아무리 자주 반복 실행한다고 해도 식상함에 먹혀 빛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런 점에서 역시나 예술품은 특별한 공간, 자주 닿을 수 없는 공간, 그러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는 것이 낫겠다.
브라이트비저는 ‘수렵채집기’에 고착되어 있는 듯 보인다. 벗어남을 통해 성장하지 못한 채 고집스럽게 수렵채집기에 머물러 있던 까닭에 도둑질이라는 발작 증상을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격이 아니라 훔치는 기술만 성장시켰던 브라이트비저는 아무리 예술품을 많이 훔쳐도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살고자 했다는 그럴 듯한 그의 이유는 아마도 유소년 시절의 환상에 들러붙어 사는 어른 아이인 자신에 대한 면피용 핑계일 것이다.
내게도 누구에게나 있는 ‘수렵채집기’가 있었다. 유소년시절로부터 청소년시절에 이르기까지 영화 포스터, 작은 문구류, 카세트테이프 등 마음에 드는 것들을 종류별로 모아서 쌓아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수렵채집기는 서서히 물러갔다. 끊임없는 이사와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모으기가 아니라 버리기를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그런 와중에도 모아지는(!) 것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근면히 흩어버리고 지나왔음에도 마그넷, 소품, 책은 언제나 군집을 이루었다. 어쩌면 끊을 수 없는 수렵채집적 본성이야말로 어린아이의 즐거움을 유지시켜주는 요술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온 것을 보니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어요.” -본서 중에서
내가 이케아 가구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브라이트비저와 다르다. 고유한 아름다움이 없는 대량 생산된 저렴한 가구여서가 아니라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나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같이 가난한 부류에게 가성비와 근접성이 뛰어난 이케아는 떨쳐버리기 힘든 브랜드였다. 불량한 내구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케아 가구를 집에 들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가난한 내가 심미주의자가 아니라 실용주의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테다. 그러나 실용주의자에게도 아름다움은 매혹적이다. 실용주의자가 아름다움을 취하는 방법은 별 수 없이 키치(Kitsch)다. 싸구려 모조품도 즐거워하는 저렴한 심미안에 가짜라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기꺼이 당해주리라.
어쩌다 보니 키치를 버린 지 좀 되었다. 요즘은 예술적 소질이 있는 딸래미를 예술 노예(?!) 삼아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의뢰한 뒤 그 결과물을 향유하는 중이다. 악덕 의뢰인 덕분에 딸래미의 포트폴리오는 다양해지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것은 더욱 다양해질 예정이다.ㅋ~
#Jun. 21. 202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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