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M. G. 바클레이의 책, <바울과 은혜의 능력>을 읽고.
공시성과 통시성은 단어에도 스며있다. 동시대성과 역사성이라는 X축과 Y축의 좌표 위에서 단어는 끊임없이 유동적이다. 마치 원석이 보석세공사에 의해 깎이듯 단어의 의미는 시간과 사회의 손길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는 한편, 새로운 더께가 그 위에 엉겨 붙고 만다. ‘선물’을 뜻하는 ‘은혜’도 예외는 아니다. ‘선물’의 의미를 어떻게 여기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은혜’의 개념이 공존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류 전반에서 통용되고 있는 선물이란 최소한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 베푸는 혜택으로 보답(감사, 갚음 등)에 대한 기대를 담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 철학자들에 의해서 선물의 의미는 다른 방향으로 정의되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어떠한 보답도 바라지 않고 타자의 행복만을 도모하는 보편적인 도덕적 의무로 선물을 정의함으로써 선물의 보답적 측면을 잘라냈다. 자크 데리다는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되돌아올 수 없을 때만이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류학자들에게 선물은 순환성(보답)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지만, 서구 철학자들에게는 비순환성이야말로 선물을 선물답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 단어가 가진 전혀 상반된 의미의 스펙트럼은 그것이 어느 시대, 어느 문맥 안에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명실상부 은혜의 신학자는 바울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은혜’와 작금의 ‘은혜’는 다른 의미의 단면을 갖는다. 오늘날 대체로 통용되고 있는 ‘은혜’는 무자격자, 무보답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신학자 바클레이에 의하면 바울이 사용한 ‘은혜’는 무자격은 포함하나, 무보답은 내포하지 않는다.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바클레이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은혜’를 극단화시켜 그것의 순수한 성분을 추출한다. 극단적 은혜의 성분은 총 여섯 가지다. 초충만성(은혜의 막대함), 단일성(선함 일색의 수여자), 우선성(항상 선수를 치는 은혜), 비상응성(무자격자에게 수여되는 은혜), 유효성(끝까지 가는 은혜), 비순환성(무보답의 미명아래 주어지는 일방적 선물).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여섯 가지 성분이 모두 함의된 은혜가 사용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애용했던 학자들은 이들 성분들 중 두 개 혹은 세, 네 개 정도의 성분이 함의된 은혜를 사용해왔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의 은혜에는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이 함의되어 있었고, 루터의 경우에는 우선성, 단일성, 비상응성, 비순환성이, 불트만은 우선성과 비상응성이 함의된 은혜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선물은 시종일관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강한 의무감을 느끼게 하며, 사전 조건이 없는(unconditioned) 것이지만 사후 조건이 없는(unconditional) 것은 아니다. 이 선물은 순환적이지만, 오직 이 선물에 응답할 인간의 행위 주체를 새롭게 만듦으로써 보답을 가능하게 한다. ‘믿음의 순종’은 부가적인 선물을 획득하기 위한 도구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 자체에 필수적인 것이다. 새롭게 역량을 가지게 된(competent) 행위 주체는 신체적인 실천 속에서 죄로부터의 자유와 의에 대한 종 됨을 표현한다. 이 순종이 없다면 은혜는 효력이 없는 것이며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본서 중에서
그렇다면 바울의 은혜는 어떤 성분들을 함의하고 있는가? 바울 은혜에는 비상응성을 중심으로 우선성과 유효성과 초충만성이 함의되어 있다. 그리고 단일성과 비순환성은 배제된다. 즉, 바울은 죄와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했으며, 동시에 그가 이해하고 있는 은혜는 사전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비상응성)이 사실이나, 사후 조건이 없는 것(비순환성)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어서 은혜(선물, 곧 복음)를 받은 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 변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변화(그리스도)를 입게 된 사람은 하나님께는 감사와 찬송을, 공동체와 이웃에게는 사랑의 실천을 행함으로써 받은 은혜를 순환시킬 수밖에 없다.
미래를 인간이 전혀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소망의 근거가 된다. -본서 중에서
이 책은 바클레이의 명저 <바울과 선물>의 보급용 버전으로, 신학자가 아닌 나와 같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출판된 책이다.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책들이 그렇듯 이 책 또한 지극히 개인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부르심은 재능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닌 까닭에, 부르신 이의 능력을 따라 충성함으로써 하나님께는 감사와 찬송을, 공동체와 이웃에게는 영적인 유익을 순환시키고야 말 것이다~ㅋ
바클레이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주해를 통해 소개받은 바울은 따뜻하고, 포용적이고, 일관성 있고, 깊이가 있는 신학자였다. 그동안 존경은 했어도 애정은 하지 않았던 사도 바울에 대한 호감도를 한 단계 상승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개인적으로 가치가 있었다.
#May. 10. 2025.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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