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하나님 앞의 생

창고지기들 2024. 3. 30. 10:09

 

 

 

 

하나님 앞의 생

 

 

나의 선택은 변함이 없었다. 스스로 자리를 정할 수 있는 대학과 대학원 교실에서 나는 줄곧 같은 자리에 앉았다. 교단을 중심으로 X축으로는 앞에서 두세 번째 줄, Y축으로는 맨 오른쪽에 놓인 의자를 차지했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그곳이 교수님의 시각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인 까닭이었다.

 

90년대 교실에서 학생들은 언제나 높은 교단 위에 서 있는 교수님 앞에 앉아 있었다. 헤게모니(hegemony)는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에 피어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강의의 주도권은 교수님의 전유물이었다. 이 때 교수님과 학생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해야 한다. 거리가 객관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며, 거리 없이 대상(학생)을 바라본다거나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교실 내에서의 교수와 학생의 거리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교사이신 하나님과 나의 거리도 이와 같을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4-5)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자리는 이미 창세전부터 예약되어 있었다. 하나님 앞(κατενώπιον αὐτοῦ)이다. 드레스 코드를 지켜야만 하는 값비싼 파인 다이닝(fine dining) 레스토랑처럼, 예약된 하나님 앞에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준수 사항이 있다. 그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하나님께 바쳤던 제물의 조건과 같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하나님 앞에 입장하기 전에 드레스 코드인 거룩하고 흠 없음을 갖춰야 한다면, 천국의 파인 다이닝은 파리를 날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어린 양의 보혈로 지은 예복을 선물해 주셨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의 예복을 입은 자들은 ‘거룩하고 흠 없음’이라는 드레스 코드를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께 입양(υἱοθεσίαν, 아들들이 됨)된다. 단순히 하나님 앞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이 제물보다 아버지와 가깝다는 것은 두말 하면 잔소리다.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제물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게다가 아들의 자리는 뒤가 아니다. 언제나 예외 없이 아버지의 앞이다. 뒷자리는 아버지를 수종 드는 종의 자리일 뿐이다. 일평생 뒤에만 있다가 결국 앞으로 불려나간 동료 하나를 알고 있다. 누가복음 8장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등 ‘뒤로 와서(προσελθοῦσα ὄπισθεν)’ 그의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누가복음 8:43-44)

 

 

12년 전, 영적 금수저 아빠인 회당장 야이로에게 딸이 태어났을 때, 여자는 혈루증에 걸려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12년 동안,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 앞에서 사랑으로 무럭무럭 성장한 반면, 여자는 아버지 없이 세상의 뒤편에서 외롭게 꾸역꾸역 죽어갔다. 회당장의 딸은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혈루증 앓는 여자는 무관심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회당장의 딸은 병상에 누운 채 아버지의 중재로 예수님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여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예수님께로 나아가야만 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당당하게 요청했으나, 여자는 예수님 뒤로 가서 조용히 옷자락을 만졌다. 그 결과 여자의 병은 즉시 나았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ἐνώπιον παντὸς τοῦ λαοῦ)’ 말하니(누가복음 8:47)

 

 

이윽고 예수님은 뒤에 있던 여자를 앞으로 소환하셨다. 그것은 그녀의 행동이 부도덕하다고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데살로니가전서 4:7). 오히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함이었다(골로새서 1:22).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모든 사람과 예수님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감격과 기쁨을 참지 못하시면서 여자를 부르셨다.

 

 

“딸아(θυγάτηρ)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누가복음 8:48)

 

 

예수님의 뒤에서 여자는 병 나음을 통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뒤에 있던 거룩하고 흠 없는 여자를 앞에 세우셨다. 그리고 “딸아”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가 하나님에게 입양(υἱοθεσίαν)되었음을 널리 선포하셨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구원) 그녀 앞의 생은 평안의 꽃길이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뒤에서 쓸쓸하고 가난하게 죽어가는 생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고도 부요하게 살아가는 생, 나아가 하나님의 품에 친밀하게 안겨 가는 풍요로운 생이 된 것이다.

 

영원한 교사이신 하나님에게 나는 그 앞에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제물 이상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어 하나님에게 입양되었기에, 나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분의 품에 안겨 살아간다. 세상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광야든지, 나는 안겨서 갈 뿐이다. 하나님 앞의 생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간다. 게다가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꾸역꾸역 평안으로 점철되는 것이 하나님 앞의 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가까이 더 가까이 하는

너 하나님 앞의 생이여,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명기 1:31) 

 

 

 

#Mar. 30. 2024.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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