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失戀)
최근에 딸아이가 실연(失戀)했다. 농사와 같았던 연애였다. 기쁨으로 씨를 뿌린 뒤, 눈물로 추수하던 그녀는 마치 울기 위해 태어난 듯이 눈물로 배를 띄우다 결국 지독하게 앓아 누워있는 중이다.
처음 그와 사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심란스러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경배와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니! 결사반대를 해야 하나? 아니면 조용히 설득해야 하나?’
마침 연말이 가까웠고, 크리스마스 본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누가복음 1:30)
주님은 내게 마리아 이야기를 하셨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잉태한 성모였다. 한동안 골똘해졌던 나는 결국, 마리아의 전철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믿음의 모험을 따라 딸아이가 오빠라 부르는 그를 받아들였고, 그들의 연애를 축복해주었다. 그 후로 삼년 동안 그녀는 나의 어린 딸에서 성숙한 여성으로 점점 성장해갔다.
실연 후, 그녀의 잦은 통곡 앞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를 유산(流産)했다는 사실을. 그러자 그녀의 슬픔이 전이되기 시작했다. 축축한 슬픔을 털어내면서, 제대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그가 나는 고마웠다. 그 동안 쉽지 않은 딸아이의 여정을 함께 동행 하면서 사랑해주었던 그였기에. 동시에 그의 상황과 그를 낳지 못하고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가 걸어가는 인생의 모든 여정이 그분께로 향하는 여정이 되기를. 그 없이 살아갈 딸아이의 여정이 또한 그러할 것이듯.
당분간은 사랑을 잃고 아파하는 딸아이의 나이팅게일이 되어야 한다. 밤낮으로 울리는 전화벨 앞에서 나는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준비한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기도한다. 그들이 아픈 만큼 더 아름답게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Jun. 10.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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