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숨은 베냐민 찾기

창고지기들 2022. 12. 31. 18:31

 

 

 

숨은 베냐민 찾기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 뜻이 무색하게 그는 무기력했다. 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동복 소생의 형마저 일찍 여읜 그에게 의지할 곳은 아버지뿐이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갈수록 빠르게 늙어간다는 것이었다. 베냐민의 매일은 머지않아 하나뿐인 의지의 대상도 사라질 것이라는 예고편이었다. 숱한 형들에게 그는 불편한 존재였다. 그의 동복 형 요셉을 강제로 팔아버린 죄 때문에, 그들은 베냐민을 볼 낯이 없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외면당한 베냐민의 자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 혹은 주변이었다. 주변부에서 그가 한 일은 조용히 아들들을 낳는 것(창46:21)이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창 42:15)


그러던 어느 날, 베냐민은 갑자기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큰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다녀온 후였다. 그들에 의하면 베냐민이 자신들과 함께 이집트에 가지 않으면 곡식도, 볼모로 잡혀 있는 시므온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베냐민만이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므온을 구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구출자(rescuer)라고 했다.


물론, 아버지는 즉각 반대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베냐민을 데려갈 수 없다고 완강히 저항했다. 시므온, 그놈의 자식은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고 했다. 그동안 말썽쟁이 시므온과 잃어버린 요셉 때문에 겪었던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식량부족으로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의 눈에도 흙이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아버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믿음직한 아들 유다가 베냐민을 위한 담보가 되겠다고 약속하자, 아버지는 별 수 없이 베냐민을 자기 장막에서 꺼내어놓았다.


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창43:16)


아버지의 과잉보호를 찢고 나온 세상은 넓고도 신기했다. 베냐민의 여행은 철없이 들뜬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도착한 이집트, 그리고 그 문제의 총리의 집.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언급할 때마다 잔뜩 겁을 집어 먹었던 큰 형들 탓에 총리의 집에 도착하면서부터 베냐민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창43:29-30)


드디어 요셉의 눈에 동복아우 베냐민이 들어왔다. 무탈하게 잘 자라주었구나, 안도감과 함께 자기 없이 훌쩍 커버린 아우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인하여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주책도 없이, 요셉은 당황해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베냐민과 형제들은 어리둥절했다. 특별히 베냐민은 막연히 무서울 거라고만 생각했던 총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형들의 말과는 달리 따뜻함을 넘어서는 강렬한 애정, 말하자면 아버지의 것과 같은 눈빛이 총리의 눈에 어려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 사라진 총리로 인하여 베냐민은 좀 전에 느꼈던 친근함을 잃어버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창43:34)


기우였다. 별 일 없이 식사 자리는 마련되었고, 모두들 모처럼 기분 좋게 먹고 마셨다. 일전에 곡식 값으로 지불했던 돈이 자루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일 때문에, 그들은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그것을 빌미로 자신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리지 않을까 걱정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 총리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관대하고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식사 자리에 초대하여 융숭한 대접까지 해주다니.’


요셉은 형들과 베냐민에게 음식을 제공하되, 특별히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주었다. 아버지 외에 누구도 그렇게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없었기에 베냐민은 어리둥절했다. 그날 식사 자리에서 만큼은 어쩐지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베냐민은 우쭐한 감정이 주는 달콤함에 흠뻑 젖어 내내 행복한 식사를 했다.

 

그 날 식사 자리에서 모처럼 모든 형제들이 즐거이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은 베냐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섯 배나 많은 음식을 받아 주인공이 된 것도 베냐민이 베냐민인 까닭이었다. 무슨 자격이나 능력이나 실력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베냐민이 요셉의 동복동생으로 태어난 이유로, 베냐민은 주인공이 되었다. 요셉이 큰 형들과의 해묵은 감정을 처리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베냐민을 매개로 일어난 일대 화해 사건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정작 베냐민의 목소리는 들려주지 않는다. 단 한 번도 마이크를 붙잡지 못했음에도 베냐민은 불만이 없을 듯하다. 결국, 형제들 간의 그 어렵다는 화해가 성사되었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복형 요셉이 돌아왔으되, 그것도 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말이다. 이제 베냐민은 늙은 아비 외에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친형으로 인하여 진짜 오른손의 아들이 될 것만 같다.

 

 

내게도 숱한 베냐민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있다. 내게도 그저 베냐민이기 때문에 다섯 배나 많은 사랑을 퍼부어주던 사람들이 있고, 베냐민 때문에 풍성하게 섬겼던 사람들이 있으며, 베냐민이라는 이유로 내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주던 사람들도 있다. 


어느새 주인공일 때보다 주변인일 때가 부지기수다. 침묵하고 있는 베냐민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는 네가 주인공임을 알려주는 일, 그것이 나의 일일 때가 심심찮다. 이를 위해 나는 숨은 그림을 찾듯이 숨은 베냐민을 찾는다. 주변인 짬밥으로 얻은 응시하고 주목하는 능력으로, 그 능력을 더하면서. 숨은 베냐민을 찾아 그에게 마침내 자신이 말씀 안에 있는 주인공임을 알려주는 일이 점점 더 기쁨이 되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Dec. 31.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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