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창 38:11)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목회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당시의 총장은 꽤 영리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여성 목사 안수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처음에 그것은 신학적 국면에서 논해졌다. 찬반으로 나뉜 양측은 성경을 근거로 서로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곧 총장이 반대편에 서면서 신학적 이슈는 정치적 뜨거운 감자로 변질되었다.
신학 논쟁으로는 승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장은 정치적 논리를 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던 교단들은 모조리 자유주의화 되었기에 여성 목사 안수는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유다와 퍽 흡사하다.
성경은 유다의 첫째와 둘째가 요절한 이유를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분명히 명시(창38:7,10)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은 달랐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의 팔자가 드세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었다 여겼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논리 속에서 셋째인 셀라도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으로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주의화의 원흉을 ‘여성’ 목사 안수 때문이라고 단정지은 총장의 기획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삽시간에 여성은 불경스러운 자유주의화를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되었고, 여성 목사 안수를 찬성하는 학자들은 자유주의자로 몰리면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총장의 뜻에 반대하던 자들은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고, 신학교에 재학하던 여학생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인 나조차 나의 여성성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그와 같은 논리대로 라면 총장은 신학교에 여학생을 입학시키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버젓이 여학생들을 입학시켜 남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에 여성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이는 남학생들과 똑같이 공부시켜 목사와 같은 소양을 갖춘 여성 사역자를 육성하되, 목사 안수와 강단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성직의 권한과 대우에 있어서는 남녀를 철저히 차별하겠다는 의중이었다. 결과적으로 강자들은 열광적으로 총장을 지지했다. 반면, 약자와 약자를 편 들던 이들은 철저히 침묵을 강요당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나의 시아버지인 교단은 나의 여성성을 엘과 오난을 죽인 자유주의 바이러스로 여전히 폄하고 있다. 동시에 나의 권리인 셀라를 주지 않기 위해 내게 친정에 가서 수절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디모데 전서 말씀을 가지고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고 꾸짖고 있다. 비록 신학교에서 남학생들과 똑같이 배웠어도 강대상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 되고, 나아가 공식적으로 말씀을 가르칠 수도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까 한지라 (창 39:25)
온갖 수모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도장과 도장 끈과 지팡이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 꾸역꾸역 베레스와 세라를 생산하는 중이다.
처음 어린이 큐티집 원고를 집필한 것은 2003년도였다. 그때 나는 큐티 원고와 함께 동화를 함께 연재했는데, 그와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은 신학교 졸업장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어린이에 이어 성인들을 위한 큐티 원고를 집필하는 중이다. 그리고 동화와 함께 묵상 글쓰기를 통해 어린이와 어른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은 시아버지인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 덕분에 얻은 베레스와 세라다.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윤리적인 틀로 읽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의 책인 성경이 다말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계보에 당당히 올려놓은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이미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를 읽는 방식에 대해서 가르쳐 준 셈이다. 그것은 윤리적인 틀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틀로 읽어야 한다. 빼앗긴 기업(하나님 나라)을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이다. 동시에 인간 편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일 필요도 있다. 다말은 지혜와 용기를 발휘함과 동시에 창녀가 되는 수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단번에 그녀로 임신하게 하셨고, 단번에 두 아들을 출산하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다말을 구속사적인 인물로 높여주셨고, 그녀의 옳음을 인정해주셨다.
내게는 불의한(!) 유다의 도장이 찍힌 목회학 석사 학위증이 있다. 그것을 딛고서 나는 내친 김에 목회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오늘도 베레스와 세라를 출산하는 중이다. 적잖은 나이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출산을 하느라 고생이나,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 고군분투하며 받아냈던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감사하게 느껴진다. 키리에 엘레이손!
#Dec. 2.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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