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인생의 더하기와 빼기

창고지기들 2022. 11. 19. 12:01

 

 

 

 

 

인생의 더하기와 빼기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의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30:22-24)

 

 

라헬은 안됐다. 타인이 가진 것을 욕망하면서 줄곧 불행하기로 작정한 듯 보이니 말이다. 언니 레아가 그토록 갈망했던 야곱의 사랑을 독식한 라헬이었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쉽사리 아들을 출산했던 레아에 비해, 라헬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들 출산은커녕 잉태조차 할 수 없었다. 은혜로 거저 얻은 남편의 큰 사랑은 갖은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아들 앞에서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국, 라헬에게 야곱은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아들도 줄 수 없는 무능한 작자로 몰락해갔을 테다. 

 

 

하나님은 자비하셨다. 그런 라헬(혹은 야곱)을 불쌍히 여기셨고,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태를 활짝 여셨다. 드디어 라헬은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라헬이 아니었다. 능력에 비해 샘이 많았던 라헬에게 첫 아들은 고작 하나였을 뿐이다. 무려 여섯이나 되는 아들을 가진 언니 레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라헬이 아들을 낳자마자 ‘요셉(하나님이 더하신다)’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요셉 자체로는 만족할 수 없고, 최소한 언니에 버금가는 아들들을 출산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라헬에게 첫 아들 요셉은 야곱이 아들을 낳게 해주는 도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아들들을 더해줄 마중물이었던 셈이다.(이러한 나의 해석은 예쁜 라헬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ㅋ)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창 35:18)

 

결국, 요셉은 이름값을 충실했다. 라헬에게 두 번째 임신과 출산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쉽지 않았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난산(難産)이었다. 결국, 라헬의 침상은 생명을 낳는 동시에 생명을 잃는 역설의 공간이 되었다. 하나님이 라헬에게 아들을 더하신 날에 그녀의 생명은 거두어 가신 것이다. 

 

죽어가면서 라헬은(레아에 비하면 이름을 참 못 짓는 그녀다. 작명이 그것을 하는 사람의 통찰력과 성품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라헬은 레아만 못한 성품과 자질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뭐~ 예뻤으니까.ㅋ) 둘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짓는다. 젖 한 번 물려보지도 못하고 가는 자신의 박복함을 한탄하며, 으스대며 자랑할 기회가 없을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장차 어미 없이 클 아들을 슬퍼하며, 라헬은 갓난쟁이를 향해 이름 불렀다. “너 슬픔의 아들, 베노니여!”

 

그러나 베노니는 라헬이 잠깐 불렀던 이름일 뿐, 아기의 이름은 곧 영원히 개명(改名)되었다. 야곱은 그를 베냐민, 곧 ‘오른손의 아들’이라 불렀다. 라헬에게는 슬픔의 아들이었을지 몰라도,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라헬이 낳은, 라헬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인 까닭이었다.

 

라헬의 산실(産室)은 요람과 무덤이 동시에 탄생한 역설의 공간이었다. 삶과 죽음, 덧셈과 뺄셈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이 인생이다. 더해달라는 욕망이 성취되자마자, 정작 욕망의 주체가 뺄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가련한 인생들의 단면이다.

 

 

 

2018년이었다. 그해 여름, 딸은 대학진학과 함께 이역만리 타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것은 내 인생의 계좌에서 커다란 금액을 차지하고 있던 존재가 일순간에 인출된 사건이었다. 그 후로 4년이라는 시간은 문자 그대로 눈 깜짝 할 사이에 흘렀고, 아이는 연어처럼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국제 학교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담임하고 있는 그녀에게 기도제목을 물은 것이 화근(?ㅋ)이었다. 자기 반 아이들의 묵상 지도에 지혜를 더해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그녀의 묵상을 지도했던 것도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퍽 흥미로우면서도 뒷골이 서늘해졌다. 인생에서 인출되었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서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까지 이자로 내 삶에 입금되었다. 꼼짝없이 나는 딸과 함께 그녀가 맡은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수고를 하게 생겼다.ㅋㅋㅋ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마25:19)

 

성경은 심판의 날을 결산할 때에 비유한다. 원금으로 장사하여 이문을 더한 자에게는 칭찬을, 그렇지 않고 원금 그대로 남긴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이 나의 주인이시다. 말씀대로 장사(순종)하여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남긴 자에게는 칭찬을, 말씀은 그대로 두고 자기 욕심(혹은 게으름)을 더하여 자기 자랑(혹은 변명)을 남긴 자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할 수만도, 뺄 수만도 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아버렸다. 갈수록 피곤해진대도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지를 늘 염두하며 근면히 살 일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Nov. 19.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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