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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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한데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축복을 모두 챙긴 후였다. 예언에 의한 비공식적인 축복(창25:23) 외에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은 공식적인 축복(창28:3-4)을 받은 후, 야곱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날이 저물자, 한 돌을 가져다 베개로 삼고 겉옷을 벗어 이불 삼아 누웠다. 따뜻하고 안전한 브엘세바를 떠나 것은 하란에서 신붓감을 찾으라는 미션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사실은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돌베개를 베고 눕자마자 들려오는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야곱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방이 뻥 뚫려 온기 하나 없는 곳에서 겉옷 한 장 덮고 잠을 청하려니, 스치는 바람에도 괜히 서러워졌다. 그러나 각박한 노정으로 인한 피곤함은 야곱을 강제로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꿈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몸을 뉘인 그 들판에서 야곱은 꼿꼿이 서 있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땅으로부터 하늘에 닿도록 서있는 사닥다리였고, 다른 하나는 사다리 위에 서계신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사다리 위의 우뚝 선채 말씀하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28:13)
퍼뜩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려움 때문에 몸이 떨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하나님은 브엘세바 제단에만 계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분은 브엘세바 제단에 붙박인 가문의 신이 아니었다.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루스의 들판에도 그분은 계셨다. 말하자면,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계신 곳에는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가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야곱은 저절로 깨달아진 진리로 인해서 숙연해졌다.
동이 트자 야곱은 겉옷을 털어 입고는 서둘러 베개로 삼았던 돌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뒤, 그 지경에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야곱은 브엘세바의 제단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돌베개를 간이 제단으로 삼아 하나님께 아침 예배를 드렸다. 만일 약속대로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시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하나님 아니라 본인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자신이 세운 돌은 하나님의 집으로 대대손손 기념될 것이며, 십일조를 드리면서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사적인 약속을 그분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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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식적(말씀을 통한 부르심) 축복과 공식적(교회를 통한 파송) 축복으로 나는 결국 야곱처럼 되었다. 아버지 이삭처럼 나를 낳아 기른 교회가 미션을 주어 나를 멀리 떠나보냈던 것이다. 나는 신부, 곧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기 위해 케냐와 우크라이나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 그것은 한데 잠을 자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줄곧 돌베개를 베고 누웠고, 깨어 일어나면 돌베개를 제단 삼아 아침마다 그 곳에서 말씀을 펴고 예배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그분은 나를 브엘세바로 돌아가게 하셨다. 내 가족, 곧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커다란 제단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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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깨달았다. ‘길을 잃었구나!’ 미국과 케냐와 우크라이나를 거쳐 20여 년 만에 무사히 고국에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잃은 길은 다름 아닌 예배였다. 참담하게도 그동안 나는 예배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참석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방황의 시작은 미국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내로라하는 미국 교회들의 예배에 가끔 참석할 때면, 나는 관찰자가 되어 그들의 예배를 비교·분석하곤 했다. 그러다 사뭇 다른 문화권에 속한 케냐에서 예배할 때는 거의 매번 관찰했다. 이와 같은 예배 관찰의 정점은 우크라이나에서 찍혔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로 드리는 예배는 나를 벙어리와 귀머거리로 만들어서는 구경꾼으로 내몰았다. 게다가 교회 전통이 완전히 다른 동방 교회를 방문할 때면, 나는 문자 그대로 외국인 관광객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방 교회 성도인 내가 동방 교회 예배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축복을 받은 후 선교사로 파송되어 미션을 수행하다가 나는 결국 예배 관찰자가 되어버렸다!(그럼에도 감사할 것은 그런 와중에도 벧엘의 돌베개 제단에서는 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면 예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참석했던 교회들은 현대적 예배를 지향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공연장 형태의 예배당에서 현대적인 악기와 음악으로 구성된 찬양, 깔끔하게 편집되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순서들을 거듭 경험하면서 남은 생애동안 이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미국 대형교회들의 자본주의 산물들을 키치적으로 베껴다 놓고는 으스대면서, 성경을 자기 메시지를 위한 레퍼런스로 이용하는 교회를 경험하기도 했다. 참담했다. 어쩌면 예배 우울증에 걸린 것인지도 몰랐다.
귀국 후에도 나는 여전히 야곱과 함께 돌베개를 베고 누워 한데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탄식하는 일뿐이었다.
“주여,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저는 예배 관찰자가 되었고, 심지어 예배 우울증에도 걸려 버린 듯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절대 눕는 법이 없는 분이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예배하는 교회에 있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나의 교회에 사닥다리를 세워 나의 임재를 드리운다. 그리고 사닥다리를 통해 올라온 교회의 기도를 듣고 하늘로부터 그것에 응답한다. 더불어 나는 나의 교회를 보호하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심장을 기울여 돌보는 중이다. 그러니 너는 속히 일어나,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나만을 예배하는 교회, 곧 브엘세바 제단으로 돌아가라.”
퍼뜩 깨어 일어나보니, 나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길을 찾는 중이었다. 잃은 상태가 아니라 찾는 상태인 까닭에 나는 기어이 찾게 될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 인하여 브엘세바는 기필코 찾아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리브가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신부로 단번에 알아보고 사라의 장막에 들인 이삭(창24:67)처럼,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를 단번에 알아보고 그곳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기를. 들에 나가 묵상했던 이삭(창24:63)처럼 벧엘에서의 개인 묵상 또한 멈추지 않기를. 그리고 나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평생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0-24)
#Oct. 8.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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