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장막 안에서
들판의 사람, 에서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Esau came in from the open country, famished.(창 25:29/NIV)
얼마나 굶었는지 몹시 배가 고파 아사 직전이었다. 무려 사냥꾼씩이나 되었으면서, 사냥한 고기는 대체 뭐하고 자신을 그 지경까지 굶겼던 걸까? 누군가는 재수가 좋지 못해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해 생긴 불상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창세기 저자가 다음과 같이 에서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Esau became a skillful hunter(창25:27/NIV)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그가 잡지 못하는 사냥감은 없었고, 사냥감 없이 집에 돌아오는 일 또한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에서는 왜 배가 고팠던 것일까? 왜 자기가 잡은 고기로는 입에 풀칠도 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요리를 할 줄 몰라서 일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요리 중 하나가 바비큐다. 불 피워서 적당히 굽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28)
아빠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를 사랑했다. 그가 사냥해온 고기를 좋아한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아빠는 큰 아들 에서의 성취를 몹시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반면, 엄마 리브가는 조용히 장막에 거주하는(창25:27) 쌍둥이 동생 야곱을 사랑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리브가는 야곱이 야곱이라는 이유로, 즉 야곱이 에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부와 생모의 손에는 편애라는 날선 검이 들려있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쌍둥이들을 반으로 쩍 갈라놓았다. 반쪽짜리 사랑은 불안감이라는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그늘에서 양육된 아이들의 키는 신경증과 함께 자라났다.
불안감 속에서 쌍둥이들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고군분투한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에서는 타고난 육체적 능력과 본성을 이용하여 열심히 사냥한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받기 위해서 에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들판으로 내몬다. 그리고 더 크고 기름진 고기를 트로피로 거머쥐기 위해서 자신을 몰아세운다. 사냥감 획득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
엄마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야곱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마땅히 받아야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온통 형에게 쏠려있는 아버지의 눈길은 단 한 번도 야곱을 사랑스럽게 보아준 적이 없다. 그리하여 야곱은 만일 장자의 명분이 비공식적(하나님의 예언)으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한 번쯤은 돌아보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고파 죽게 생긴 형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죽 한 그릇과 장자 명분을 바꾸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큰 아이의 업적과 성취를 갈망하는 것은 비단 이삭만은 아니다. 나 역시 첫째에게 그것을 기대하곤 했다. 작은 아이는 존재하여 내 곁에 살아주는 것만으로 어여쁘고 고마운데, 큰 아이는 사냥감을 트로피로 들고 와야 비로소 예뻐 보였던 것이다.
나 또한 큰 아이이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적과 성취에 연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집 첫째처럼 어려운 문제들은 쏙 빼놓고, 업적과 성취는 크게 더해서 부모님께 자랑하듯 이야기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그분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참 오래 걸렸다. 둘째를 낳고 비로소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니까. 이는 대단한 기적이다. 자녀를 여럿 낳고도 여전히 성취 없이는 그분께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믿음의 동료들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친구의 아들이나 딸을 칭찬할 때면, 첫째와 둘째는 각각 다르게 반응한다. 둘째는 대뜸, “대단하네!”라며 나의 칭찬을 쿨하게 인정하며 받아들인다. 반면, 첫째는 다르다. “잘 됐네!”라며 말로는 인정하지만, 표정이나 말투에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묻어있다.
어느 날 주의 은혜가 임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엄친 딸이나 아들에 대한 칭찬이 첫째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이삭의 장막에 횡행하던 편애의 영이 내게도 동일하게 역사한 까닭이었다. 깨달음 안에서 나는 참회의 시간을 가졌고, 곧바로 첫째에게 나의 연약함이 가한 상처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 후, 나는 첫째 앞에서 함부로 칭찬하지 않는다. 예민해지는 그녀를 예민하게 느끼게 된 탓이다. 그리고 수시로, 그리고 느닷없이 “우리 이쁜이 엄마가 사랑한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낯 뜨거운 고백을 뻔뻔스럽게 한다. 업적과 성취 없이는 칭찬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나를 끊임없이 회개하는 중인 것이다.
이삭의 장막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두 아들 에서와 이삭을 응시한다.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위해 배고파 죽을지언정 반드시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에서가 안쓰럽다. 이삭의 사랑의 눈길을 받기 위해 형의 것을 치사하게 가로채려한 야곱도 안 됐다.
“에서야~, 야곱아~, 이리 와봐~”
나는 아이들을 한데 부른다.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연약한 부모를 대표해서 미안하다고 그들에게 사죄한다. 그리고 모든 자녀들을 공평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주는 안정감을 그들과 나눈다.
만사의 기한과 때를 따라, 아마도 큰 아이는 첫 번째 실연(失戀)을 시작한 것 같다. 둘째 아이는 대학 입시라는 부담감을 견디며 밤낮없이 애를 쓰는 중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페이지를 오롯이 살아내고 있는 그들이다. 그런 자녀들을 응원하며, 어미인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어떤 어려움이 속에서도 스스로를 굶기며 방치하지 않기를, 경쟁을 통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상속받을 천국은 충만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너그럽고 여유롭게 살아가기를!
이삭의 장막에서 나와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밤하늘에 아브라함이 보았던 별이 한 가득이다.
#Sep. 24. 202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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