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순전한 제물 ‘까닭 없이’

창고지기들 2023. 1. 7. 17:23

 

 

 

 

 

순전한 제물 ‘까닭 없이’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은 옳다. 단, 물리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인문 과학적 세계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도 얼마든지 연기가 날 수 있다. 낡은 굴뚝의 내부가 일시적으로 무너져 내려 일으킨 먼지를 두고 불완전 연소로 말미암은 연기라고 몰아붙일 수 있는 곳이 인문 과학적 세계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곳에서 살아간다. 억울한 일은 찌든 때처럼 곳곳에 끼어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는 특징들 중 하나는 자기 성찰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의 대명사로 자기 검열에 매우 뛰어났다. 그의 기도인 동시에 손수지은 시에 정직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시51:10) 해달라는 종류의 구절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의 대가(大家)가 곤경에 처했다. 일군의 무리가 그를 해칠 목적으로 함정을 파고, 그물을 숨긴 채 그의 멸망을 꾀하고 있었다. 실존의 위험 앞에서 그는 정직에 정직을 더하고 곱하여 자신을 들여다보며 재차 반성하고 감찰했다. 성찰이 깊어질수록 그의 번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들의 악행의 원인으로써의 자기 잘못을 도무지 찾을 수 없던 까닭이었다.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시35:7-8)


부당하게 나의 원수 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시35:19)


각고의 성찰 끝에 다윗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윗은 무고(無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윗을 해치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과(因果)의 부조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다윗은 ‘까닭 없이’라는 제물을 골랐다. 순전한 제물 ‘까닭 없이’를 들고 제단으로 나아간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하소연했다. 

 


신경증은 잘못의 원인을 오로지 자신에게서만 찾는 자들을 사냥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뭐든지 남만 탓하는 사람들은 인격 장애를 앓기 쉽다.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기 잘못 찾기를 쉽게 한다는 점에서 나는 신경증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라는 대전제는 선택적 인식과 억압을 통해 기어이 내게서 잘못을 찾아내거나 혹은 내게 잘못을 강요한다. 아니면, ‘교만’이라는 만능 죄를 찬스로 삼아 나로 꼼짝없이 유죄를 인정하게 만든다.


닫혀있는 자동 유죄 시스템에 종속된 사람이 건강할 리 없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편리한 자동화 시스템에 애써 저항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 상황을 일반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각각의 상황을 구체적이고도 특별한 단 하나의 사안으로 보고, 그에 맞서서 철저히 시시비비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을 억울하게 하지 않을 요량으로 자신을 억울하게 하는 자기 학대에 익숙해질 수 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분의 계명을 위배하는 것이다.


다윗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것이 자신을 해치려는 그들의 행동에 ‘까닭 없음’을 붙인 이유다. 그들의 악행에 까닭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즉, 그들 악행의 원인은 그들의 악함 때문이다. 그들은 악인이기 때문에, 악행을 일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다윗은 그들의 처벌을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했다. 이로써 다윗은 신경증과 인격 장애의 손아귀에서 멀리 달아날 수 있었다. 

 


억울하기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단연 최고다. 한 점 부끄러운 죄 없이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기 학대나, 저들을 탓하며 저주하지 않으셨다. 그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달라고만 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예수님은 공의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과 동시에 저들의 무지를 불쌍히 여겨 선처해달라고 요청하셨다. 심리적 유죄 기제(자동화 시스템)에 저항하며 시종일관 자유하신 이유는 여기에도 있을 터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 수도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삶은 부쩍 가벼워진다. 까닭 없이 미움을 받고, 손해를 당할 수 있다는 곳이 나의 사회·문화적 환경이다. 아니 땐 굴뚝에서는 일절 연기가 날 수 없는 세상은 동화적이고 이상적이다. 물론,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일을 어리석다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 꿈이야 얼마든지 꿀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 동화와 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지혜다. 

그동안 ‘까닭 없이’ 당했던 일들을 재판관이신 주께 탄원해 본다. 그리고 ‘까닭 없이’ 행해온 나의 잘못들(내 정체의 바로미터)을 지속적으로 감찰해 주십사 주께 간구해 본다. 순전한 제물 ‘까닭 없이’를 들고 제단으로 나아가, 그것으로 자유와 맞바꾸어 장성하는 한 해가 되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Jan. 7. 2023.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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