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쫓겨난 자의 축복

창고지기들 2017. 4. 29. 01:25







쫓겨난 자의 축복



얼마 전, 공짜 앱 하나를 다운 받았다. 

갖가지 다양한 프레임으로 사진을 꾸미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찍은 가족사진을 

이 프레임, 저 프레임에 대입시켜 보았다. 

똑같은 사진인데도 프레임에 따라서 퍽 달라 보였다. 

프레임은 그런 것이었다.

 

요즘 들어 심심찮게 하는 일이 있다. 

<선교사>를 이러저러한 프레임에 넣어보는 것이다. 

그것을 즐겨 하게 된 것은 프레임 속의 명사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인 까닭이다.

얼마 전까지 그것은 꽤 근사한 프레임에 담겨있었다. 

일명, 노마드(nomad) 프레임! 

유목민, 방랑자라는 뜻의 

노마드 프레임의 오리지널은 아브라함이다. 

여호와께서 주시마 약속하신 씨를, 

주시마 약속하신 땅에 뿌리기 위해서 

기꺼이 나그네가 되었던 어른이 아브라함이다. 

선교사를 노마드 프레임에 넣고 보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께서 정해주신 땅으로 보냄을 받는 방랑자로 보였다. 

꽤나 믿음직스럽고, 모험적이고, 진취적이고, 

게다가 낭만적인 뉘앙스가 물씬했다. 


그러나 노마드 프레임은 오래지 않아 벗겨져 버렸다. 

마음속에 기승하던 긍정적 기운이 

느닷없이 등장한 부정적 기운의 패기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깨어진 노마드 프레임을 대신한 것은 

쫓겨난 자 프레임이었다. 



뿌리 뽑힌 나그네 인생은 

뿌리 내릴 땅을 갈망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4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뿌리 뽑혀 살았던 선교사로서 

나는 정착하여 살아갈 땅을 갈구했다. 

그러나 기대는 끝내 어긋나고 말았다. 

결국 삶은 땅에 깊이 박히지 못한 채, 

부유하는 먼지처럼 다시 허공중에 떠올랐고, 

강하고 급한 바람에 밀려 

낯선 땅으로 쫓겨날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적국으로 끌려갈 날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포로처럼. 


어쩌면 쫓겨난 자 프레임은 

좌절된 욕구의 복수인지도 몰랐다. 

복수를 당한 눈으로 보니 

쫓겨난 자 프레임을 씌운 사진은 꽤나 불신앙적이고, 비관적이고, 

체념적인 뉘앙스들이 범벅이 되어 흉물스러워 보였다. 

그런데도 버젓이 방 한 가운데 전시되어 있었으니, 곤욕스러웠다. 

오랜 만에 미가의 방문을 받은 것은 그 때였다. 

그는 쫓겨난 자 프레임의 저작권을 가진 선지자들 중 하나였다. 

그는 냉큼 안으로 들어와서는 흉한 사진 앞에 섰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발을 저는 자는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들이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다스리리라 하셨나니 

네 양 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소사가 죽었으므로 

내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미 4:6-10)



미가는 쫓겨난 자 프레임을 입고 있던 사진을 오랫동안 감상했다. 

곁에 선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문득 그는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고여 들었다. 

그러더니 작품을 깊이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충고를 

낭랑한 목소리로 연주해댔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호통을 들을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선교사가 쫓겨난 자인들 어떠리,

선교가 하나님의 일, 곧 구원인 것을.

쫓겨난 자들에게 고통은

해산하는 여인과 같아서 

극한의 것이기는 하겠으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


고향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다시 바벨론으로 끌려가더라도

얘야, 절망할 필요는 없단다.

쫓겨남의 끝자락, 포로의 종착지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비로소 시작될 테니까.


해산한 여인이 아기를 품에 안듯이

멀리 쫓겨났던 자들은 강한 나라가 되고,

패배감과 실망감은 예루살렘의 제단에서

승리와 소망으로 새롭게 창조 될 것이니,

그것이 여호와의 구원이요,

하나님의 선교란다.



미가의 노래를 들으며 쫓겨난 자의 축복을 가늠해 보았다. 

그것은 완전한 은혜의 선물이었다. 

여호와의 선택으로 지어진 축복.

 받을 자격 없는 이에게 넉넉하다 못해 

충만하게 부어주는 긍휼과 자비.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쫓겨난 자 프레임을 씌운 선교사도 썩 괜찮았다. 

개선장군처럼 목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선교지로 향하지 않아도 되겠다. 

쫓겨나는 자들이나 다리를 저는 자들처럼 

고개를 숙인 채 절뚝이면서 걸어가도 괜찮겠다. 

쫓겨나는 자가 고향 같은 성읍 LA를 떠나, 

거대한 들판 우크라이나를 거쳐, 

성읍 키예프 까지 이르면 

여호와의 구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쫓겨난 자들을 기필코 따라오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그 땅이 속량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Apr. 26.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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