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묻고 떠나고

창고지기들 2017. 4. 8. 00:30






묻고 떠나고



#1.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행진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민 11:35)


떠나는 그들의 등 뒤에 있었던 것은 그림자만은 아니었다. 

무덤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탐욕스럽게 먹다가 죽어간 자들의 무덤, 

그것은 이스라엘 얼굴의 마맛자국이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 11:4-6)


애굽에서 값없이 먹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노예로 노동력을 값없이 제공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먹은 음식은 지속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 

애굽이 보급한 사료였다.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안의 노예근성은 고함쳤다.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게만 해준다면 

개, 돼지, 소처럼 가축으로 살아도 좋다고. 

사람이길 포기한 그들에게 

인간의 전유물인 자유는 헌신짝만도 못했다. 

무려 400년 동안이나 학습되어왔던 노예근성이 

쉬이 사라질 리 만무했지만, 자유를 주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던 여호와도 

배신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축처럼 살고 싶어 하다니!’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민 11:31)


세상 어디에도 탐욕에 눈먼 자들을 만족시켜줄 것은 없다.

매일 지천에 널린 만나에 침을 뱉은 후 

그들은 이틀 동안 메추라기를 욕심껏 모았다. 

그 사이 고기는 빠르게 부패해갔다. 

하지만 욕심에 혈안이 된 눈은 그것을 식별할 수 없었다. 

눈 먼 자들은 고기로 배를 흠씬 채웠다. 

배가 무덤처럼 불룩하게 불러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죽음이 그들을 삼켰다. 

기브롯 핫다아와. 

탐욕스럽게 먹다가 죽은 자들의 무덤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래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바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욕심을 부리다가 짐승보다 못한 피조물로 

전락한 자들을 묻고, 이스라엘은 하세롯으로 떠났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 12:1-2)


격렬한 주도권 싸움은 하세롯을 무대로 벌어졌다. 

이스라엘의 넘버 1이었던 모세가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빌미에 지나지 않았다. 

껍질 아래에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이미 충만해있었다. 

넘버 2와 3인 미리암과 아론의 마음에 최고 권세가가 되고 싶은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재혼을 재빨리 스캔들로 이슈화시킨 후, 

여론 몰이로 모세를 거세게 비방했다. 

더불어 여호와의 핫라인은 모세뿐만 아니라 

그들도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권력을 손에 쥘 자격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미리암과 아론 일파는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로 분했다. 

최고 지도자를 코너에 몰아넣고는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따지고 보면 비방의 근거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모세는 일종의 금기라고 할 수 있는 

이방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세계 최정상(민 12:3)의 온유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신랑 상황과 신부 성품이 합방을 하자 어린 양이 수태되었다. 

모세가 이리떼 앞의 어린 양이 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 어떤 변명도, 저항도, 역습도 없었다. 

그는 다만, 모든 것을 여호와의 판단에 맡겼다.


이윽고 판결의 때가 되었다. 

재판장인 여호와께서 당사자들을 재판소인 회막 앞으로 소환하셨다. 

곧 바로 판결 주문이 낭독되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6-8)


“모세는 무죄, 미리암과 아론은 유죄를 선고한다!” 


다툼의 주동자였던 미리암에게는 가중 처벌이 내려졌다. 

나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다급해진 아론은 체면 따위는 구겨버리고 

모세를 붙들고 선처를 호소했다.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민 12:11-12)


최상급 온유의 소유자 모세에게 

배알 따위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개망나니 이스라엘을 지도하고 인도하면서 

창자가 조금씩 끊어지고 버려졌던 것이다. 

모세는 재판장에게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었다. 

미리암이 자신에게 얼마나 상처를 가했는지는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오직 그녀의 회복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쯧쯧쯧! 그런 치도곤을 당하고도 미리암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여호와는 모세를 타박을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대견함과 자랑스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모세 덕분에 백번 양보하던 여호와께서 천 번 양보하셨다. 

미리암이 칠일 동안 진영 밖에서 자숙의 시간을 가지면 

낫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민 12:14)


이스라엘은 하세롯에서 칠일을 더 지체했다. 

수치를 당한 채 진영 밖에서 회개하던 미리암을 기다려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지도자 미리암을 정죄하지 않았다. 

왜 그녀 때문에 칠일을 더 지체해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미리암과 함께 수치를 당했다. 

시간은 흘렀고, 미리암은 다시 진영 안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이스라엘은 바란 광야로 떠났다. 

모든 수치 일랑은 하세롯에 묻어 두고서(민 14:16).



#2.


길손은 매우 꾸준히 떠난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것은 그의 일이다. 

떠나온 길마다 흔적이 남는다. 

노상에는 발자국이 남고, 잠시 요기를 한 곳에는 음식 부스러기가, 

하룻밤 머물던 곳에는 그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몸져누운 풀들의 앓는 소리가 남는다. 

부러뜨리지 않는 이상 떠나는 길손의 발목을 붙잡을 방법은 없다. 

나그네는 그저 길을 떠날 뿐이다. 

무엇이든지 뒤에 묻어둔 채로.


나그네 이스라엘도 그랬다. 

그들은 기브롯 핫다아와에 탐욕을 묻은 후 하세롯으로 떠났다. 

하세롯에서는 수치를 묻고 바란 광야로 떠났다. 

그곳의 코앞에 목적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지가 아니라 

다시 광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만들어온 

그릇된 프레임을 채택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바란 광야에 불신앙을 묻고 

다시 멀고도 험난한 길을 떠났다.


끝도 없이 떠난다는 점에서 나도 다를 게 없다. 

한국에서 미국, 미국에서 케냐, 다시 케냐에서 미국에 이어 

이번에는 미국에서 우크라이나로 떠나는 길손이 된 것이다. 

또 다시 떠나야하는 지점에서 나는 뒤돌아선다. 

뒤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응시해 본다. 

그리고 기나긴 여정의 중간 중간에 

무엇을 묻었는지 헤아려 본다. 

응시하던 눈을 감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자기 숭배를 묻고 떠났다. 

다음엔 안정과 번영을 묻고 떠났으며, 

그 다음엔 믿음의 환상과 무능력을 묻고 떠나왔다. 

그리고 이제, 자기주장과 불신앙을 묻고 떠날 차례가 되었다. 

이스라엘처럼 탐욕과 수치를 묻고 

목적지를 향해서 또 다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도 묻어야 할 것들은 

몸의 때처럼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묻고 떠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근면히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몸과 마음은 

한동안 앓고 말 것이겠지만. 

키리에 엘레이손!





#Apr. 3. 2017 사진 &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쫓겨난 자의 축복  (0) 2017.04.29
막기타로 영화롭게 하기  (0) 2017.04.22
다시 선교  (0) 2017.04.01
묵상모임 짓기  (0) 2017.03.25
산 밑의 제자  (0) 2017.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