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세 편의 동화가 마중물이 되어 준 셈이었다.
그 천진난만함과 가벼움과 몽환적임에 쫓겨
영악하고, 뚱뚱하고, 리얼한 이야기에 덜컥 안겼던 것이다.
그렇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만나 두 달 간 씨름했다.
독서 여정은 다소 지루했으나,
숙제 같았던 책을 한 페이지씩 꺾는 맛은 썩 괜찮았다.
아버지 카라마조프 씨는 명백한 땅의 사람이었다.
배꼽에 땅의 탯줄을 달고 태어났다는 점에서
일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메인 캐릭터인
조르바의 큰 형님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유익과 만족만을 위해서
악착같이 살았던 인물이었으니,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리 만무했다.
죽은 두 부인들에게서 태어난 세 아들은
일찌감치 아버지 슬하에서 내동댕이쳐졌고,
때가 이르자 그들은 아버지 무릎 아래가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리로 모여들었다.
큰 아들 미챠에게 카라마조프 씨는
미녀 그루센카를 사이에 놓고
수컷 대 수컷으로 대적하는 연적이었고,
둘째 아들 이반에게 아버지는 파산한 자신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을 무정한 구두쇠였으며,
막내아들 알료사에게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사랑으로 용납하고 싶은 불쌍한 노인네였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카라마조프 씨의 사생아로 추정되는 스메르쟈코프다.
그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한낱 요리사로 고용한 매정한 주인일 뿐이었다.
소설 속 화자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막내 알료사를 지목했다.
그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의 아버지인 카라마조프고,
다른 하나는 영의 아버지 조시마 장로다.
조시마 장로 사후(死後),
알료사는 장로의 유언대로 세상 속으로 보내졌고,
그 속에서 육의 아버지 카라마조프의 죽음과
그에 따른 재판 과정에 참여했다.
그렇게 소설은 중반 이후에
아버지 카라마조프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펼쳐놓았다가
다시 하나로 봉합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대사 위주의 소설이었기에 독서의 과정은
각 캐릭터들의 수다를 들어주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모임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이미 훈련이 된 터였다.
그래서 캐릭터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은 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과는 달리,
시종일관 청자로 고정되어 있던 탓에 피곤하기는 했다.
그래도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일차 권리인 듣기는 원 없이 해본 셈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란 심지어 악인들조차도
우리가 대략적으로 단정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순진하고 순박한 법이다.
이건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본서 중에서
“... 카라마조프는 정말로 천성 상 두 측면,
두 심연을 아우르기 때문에,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싶은 욕망이
자제할 수 없을 만큼 치밀어 오를 때조차도
뭔가가 다른 측면에서 그에게 충격을 준다면
즉각 발길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 다른 측면이란- 바로 사랑,
그 당시 화약처럼 불타오른 새로운 사랑인 것이며
이 사랑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변호사 페츄코비치의 말
저자는 인간의 양면성을 시종일관 강조했다.
즉, 인간의 내면은 선과 악이 치열하게 공존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로 축소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선을 행할 때조차 악해질 수 있으며,
반대로 악할 때조차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패러독스는 재판을
종종 미궁에 빠트리곤 한다.
법정에서 하는 일이란
선과 악(무죄와 죄)을 명명백백히 구별 짓고 판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의 깔끔한 구별은 축소시킬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어느 쪽으로도 축소시킬 수 없는 패러독스가 등판하면
재판은 네버 엔딩 게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갈수록 어려운 것이 사람이다.
상대를 이해할수록 번민은 더해져만 간다.
선과 악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사람(나를 포함한)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국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모든 악함에도 불구하고 알료사가
카라마조프를 아버지로 받아들였던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다.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없었던 그것으로 그는 아버지를,
그리고 형제들을 받아들였다.
오직 사랑 하나로 그들의 악함과 선함,
그 패러독스를 모두 포용했던 것이다.
“... 인류 전체를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인 사람들,
즉 사람들 개개인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몽상 속에서 인류에 대한 열정적인 봉사를 생각하기에 이르고
갑자기 어떤 식으로든 요구가 있을 시엔 어쩌면 정말로 사람을 위해
십자가 행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를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
정작 고작 이틀도 누구와 한 방에서 지낼 수가 없다,
이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고 말하더군요...
대신, 개별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증오하게 될수록
언제나 인류 전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더욱 더 불타오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몽상적인 사랑과 비교할 때
실천적인 사랑이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니까요.
몽상적인 사랑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 무대에서처럼 어서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하지만 실천적인 사랑,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미리 말해 두건대
부인께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목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될 바로 그 순간에,
부인께 미리 말씀드리지만,
부인은 갑자기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부인 앞에서 언제나 부인을 사랑했고
언제나 부인을 인도했던 주님의 기적적인 힘을 보게 될 겁니다...”
-조시마 장로의 말
‘세계 선교’라는 거대한 말은
종종 지구본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는 사진으로 이미지화 된다.
교회에서 아시아를, 아메리카를, 유럽을, 아프리카를 품고
선교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것도 사실이다.
숫자와 통계를 통해 선교 실적을
한 눈에 보여주면 자긍심으로 충만해지며,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좀 더 높은 실적(?!)을 올릴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사랑으로
선교 열정과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쉽다.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선교에 헌신하게 만들기엔
조시마 장로가 이야기 했던
몽상적인 사랑만큼 유용한 것도 없는 것이다.
곁에 있는 가족이
사랑이 고파 죽어가는 것에는 둔감하면서도,
이역만리 떨어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거짓 승리감에 도취되지 말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다들 똑같은 계단에 서 있는 거야.
다만,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고 형은 저 위쪽,
어디 열세 번째 계단쯤에 있을 뿐이지.
이 문제에 대한 내 관점은 이런데, 이 모든 것이 똑같은 것,
완전히 동일한 성질의 것이야.
아래쪽 계단에 발을 내디딘 사람은
어떻든 꼭 위쪽 계단까지 올라가게 될 테니까.”
-알료사의 말
알료사의 말은 옳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계단 앞에 서있을 뿐이다.
상대가 자기보다 조금 더 높이 올랐다고 해서
그를 욕되다 하고, 자신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나 나나 욕된 계단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니 말이다.
이것만 알고 있어도
사랑하고 포용하는데 훨씬 편안해질 것인데!
알료사는 속으로 ‘아마 자기가
마챠 형한테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때때로 형을 증오하는 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
-본서 중에서
미안함이 증오로 바뀐 경험이 없지 않다.
그 놈의 사악한 교만 때문이다.
그것은 미안함을 먹고도 버젓이 증오를 싸댄다.
정작 잘못은 본인이 했으면서도,
자신을 미안하게 만들었다고
상대를 정죄하면서 미워하는 것이다. 쳇!
대화를 풀어내고 이어가는 재주,
어지럽고 혼돈스러운 파티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능력,
대사를 통해 인물의 성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저자의 솜씨 앞에서는
정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이런 소설을 낳았다는 사실은
작가에 대한 존경심마저 충만히 고여들게 한다.
게다가 세 아들의 캐릭터에서
각각 열정의 베드로, 지적인 바울,
은혜의 요한의 향기가 느껴지자
책 속으로 들어가 스쿠버 다이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니 독서 내내 상당한 장문인 원작을 최대한 살려서
멋들어지게 번역한 김연경님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았을 수 없었다.
흐음~
#Oct. 24. 2016.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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