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그레이엄의 책,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읽고.
갖은 대의와 명분을 끌어들여
이유를 애써 마련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삶이었다.
본성을 거스르는 삶이었으니,
자신을 능가하려는 의지의 투쟁은 늘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초인이 되려고 발버둥 치던 의지는
끝내 소진(消盡)되고 말았다.
특별히 사람 이상이 되려 하다 핍진했으니,
사람 이하가 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조절을 통해 사람 수준으로 평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동물로의 인카네이션!
이것이 겸손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는
우화(寓話)에 손을 댄 이유다.
1908년에 발표된 이후로 꾸준히 사랑받아온
케네스 그레이엄의 동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는 F4,
곧 꽃보다 예쁜 동물 4마리가 주인공이다.
모울, 래트, 토드, 그리고 배저 아저씨.
그들은 저마다 특유의 기질과 성품으로 온갖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관계, 곧 우정을 목적으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동물들 머리 위에 있던 별들은 점점 더 밝아지고 커졌고,
어디선지 모르게 노란 달이 조용히 나타나서
여행자들 사이에 끼여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본서 중에서
와일드 우드와 그 주변 세상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노란 달’이었다.
우울감으로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그보다 제격인 역할도 없었다.
누런 달이 되어 조용히 그들의 대화에 엿듣기를 반복하자,
마음까지 조금씩 노릇노릇 말랑해져갔다.
눈이 하도 많이 쌓여서 여기저기 커다란 나뭇가지들이
순전히 눈 무게로 부러져 있었어.
울새들은 나뭇가지에 앉아 껑충거리면서
자기들이 부러뜨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우쭐대고 있더라니까.
-본서 중에서
지금까지 내가 부러뜨렸다고 여겼던 나뭇가지들을 헤아려 본다.
눈의 무게를 못 견뎌 부러진 것이 대부분인데도,
하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어
공치사(功致辭)를 하려고 했으니, 나는 울새였던 것이다.
우쭐거리던 울새가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워서
내 얼굴은 노을만큼이나 붉어졌다.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신비로운 탐험지였던 잡목 숲, 골짜기, 채석장,
그리고 감춰져 있던 모든 곳들이 이제는 가슴 아프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지니고 있던 비밀을 모두 다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낡은 속임수로 모울에게 장난을 치고 술수를 쓸 수 있을 때까지
자신들의 초라한 몰골을 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 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모울은 화려한 옷을 벗어 던지고
아무 꾸밈없이 순순한 모습을 드러낸 자연을 보는 게 좋았다.
-본서 중에서
농경 문화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안식’이라는 말에서 겨울의 체취를 느낀다.
여름의 매혹은 양(量)으로부터 쏟아지기도 한다.
나뭇가지마다 썩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초록 나뭇잎들은 황홀하다.
작은 잎들이 모여 한데 힘차게 뿜어내는 생명력의 싱그러움 때문이다.
매혹적인 여름 속에서 부지런히 일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천하의 베짱이도 노래라는 일을 근면히 하지 않았는가!
그러다 겨울이 되면 매혹은 사라진다.
마치 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로 자리에 누운 여인처럼 겨울은 꾸밈이 없다.
비밀도 없고, 술수도 없다.
초라하고 무능력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가려주고, 꾸며주고, 인정받게 해주었던
여름날의 잎들은 모두 낙엽지고 말았다.
겨울은 이미 도착했고, 나는 가난하다.
화장을 지운 적나라한 얼굴은 잡티와 주름으로 가득하다.
겨울에 할 일들 중 하나는 비밀도, 술수도, 능력도
죄다 벗은 나를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동물 예법에 따르면,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는 시기에는
격렬하고 영웅적인 일은 물론이거니와 조금이라도 활동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그때는 모두가 졸릴 시기이고, 실제로 어떤 동물들은 잠만 자기도 한다.
대개는 날씨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밤이건 낮이건 견디기 힘든 때를 피해서 휴식을 취한다.
그 기간에는 근육을 단련시키고 힘을 최대한 모아 두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겨울에 할 일은 없다.
그것이 안식일에 할 일이 없는 이유다.
안식일은 졸리는 날이고, 그래서 실제로 잠만 자야 하는 날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는 것 자체,
그리고 추위가 지나가기를 견디면서 쉬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다.
그렇게 막연하게 쉬다보면 노역으로 뭉쳤던 근육은 다시 회복되고,
소진 되었던 힘은 다시 충전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어떤 얘기에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은 듯했고,
“거 봐. 내가 그랬잖아.”라든가 “내가 말한 대로야.”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이렇게 했어야지.”라든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모울은 아저씨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배저 아저씨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린 그 녀석들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
우린 배우고 싶어, 배우고 싶다고! 우린 그렇게 할 거다!”
-본서 중에서
이 겨울, 배저 아저씨 같은 동료를 만났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어서 무슨 요상한 말을 해도 놀라거나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
꼰대스럽지 않아 가르치려 하거나 꾸짖지 않고 오히려 배우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지 말고, 네가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지!’라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주둥이를 대신해서 날려줄 수 있는 사람.ㅋ~
토드는 똑바로 일어나 앉아서 눈물을 닦고, 차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었다.
그리고 곧 거리낌 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가 살았던 집과 그곳의 생활이 어떠했으며,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고, 친구들이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따위의 이야기들을.
간수의 딸은 이런 이야기들이 맛있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토드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 사실이었다. 아가씨는 계속하라고 토드를 격려했다...
토도는 어느새 매우 낙천적이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옛날의 토드로 돌아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가씨와 토드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지루한 날들을 보냈다.
간수의 딸은 토드에게 점점 미안해졌다.
사소한 죄로 작고 가엾은 동물을 감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아주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허영심 많은 토드는 간수의 딸이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토드는 활기차게 걸어가면서 지금까지 한 모험과 탈출
그리고 상황이 가장 안 좋았을 때에 자신이 어떻게 해서 빠져 나왔는지를 생각했다.
가슴 속에서 자부심과 자만심이 부풀어 올랐다.
-본서 중에서
토드.
미련하고, 교만하며, 허영심이 충만한데다,
거리낌 없이 민폐를 끼치는 짜증 유발 캐릭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게도 토드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치부를 들킨 듯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꽤 언짢았다.
그래도 모울과 래트와 배저 아저씨와 같은 친구들을 가졌으니
녀석은 얼마나 행운아인지!
토드 같은 캐릭터에게도 그런 귀한 친구들을 허락한
저자 케네스 그레이엄에게 감사할 뿐이다.
토드는 배저 아저씨가 모울한테는 잘 대해 주면서
자기한테는 상냥하게 칭찬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아서 좀 속이 상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자기가 얼마나 근사했고, 얼마나 멋지게 싸웠는지 설명했다.
-본서 중에서
내 아이들 중에도 토드는 있다.
어미로서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 중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했던 일만을 골라 늘어놓는 아이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상냥한 칭찬의 말 한마디를 던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있는 그대로 멋지고 귀한 아이야!’라고.
모울, 래트, 모트, 배저 아저씨의 이야기를
흠씬 듣고 나니 마음이 폭신해진다.
우정이라는 관계에 얽혀서 풍성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부요함을 나눠받은 느낌이다.
계속해서 동화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조지 맥도날드가 될 것이다.
#Aug. 23. 2016.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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