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동방박사의 소원

창고지기들 2016. 1. 22. 18:01






동방 박사의 소원



동료(?!)들 중 더러는 나를 얕잡아 보았다.

여성인 내게 목회학 박사 학위가 있다는 이유였다.

목사도 될 수 없으면서

(나의 교단은 여성목사안수불가 방침을 고수하는 중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학위가 얕잡힘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퍽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익숙해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들 안의 시기심을 눈치 챈 탓이었다.



“저는 제가 쓴 대로 살려고 해요!”


지행일치(知行一致)는 유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덕목이다.

믿음의 내용(지식)과 행함의 일치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강조되어 왔다.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은 묵상과 묵상 모임에 관한 것이었다.

수 년 동안 묵상과 묵상 모임에 관해 배우고 경험했던 것들을

정리하는 차원의 조약한 논문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말씀의 정신에 입각하여

묵상과 묵상 모임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그것에 대한 지식은

끊임없이 확장과 수정을 반복해왔고,

덕분에 묵상과 묵상 모임과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2, 9-10)



처음에 묵상과 묵상 모임은 대단한 스타(star)였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크고 환한 손가락이었다.

새까만 밤하늘 같던 나는 스타가 이끄는 대로 걸었고,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쁨을 받았다.

스타를 쫓는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멀고도 험난한 여정임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묵상 때문에 시(city)를 옮겨 다니는 이사에 이어,

대륙을 넘나드는 이사를 하면서,

비로소 그 길에 즐비한 것이 환난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멀리 온 까닭에 쉽게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아프리카 케냐에 멈춘 별을 보고서

나의 묵상과 묵상 모임은 시작되었고, 4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별을 쫓아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는

다름 아닌 나였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복음 2:11)



아프리카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아마도 나는 왕궁에서 태어난 아기를 꿈꿨던 것 같다.

그러나 아기는 왕궁에 없었다.

그는 누추한 집에 앳된 엄마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 스타가 가리키던 것은

초라한 곳, 초라한 여자, 초라한 아기였던 것이다.

반짝이는 묵상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누추한 현실의 아기임을 받아들이기 까지 퍽 오래 갈등해야 했다.

그러나 동방 박사의 마땅한 소임은

비록 초라해보일지라도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값비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것이다.



수만 킬로미터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동방 박사들 앞에

보잘 것 없는 아기가 누워계신다.

나는 그들이 느꼈을 법한 당혹감을 상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아기를 경배하고,

준비해온 소중한 것들을 내놓는 고충을 떠올려본다.

동병상련이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태연한 척

내 소중한 것(생명)을 아기께 아낌없이 드리기로 한다.



묵상은 저 높은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다.

지식이 더해져 갈수록 화려하고도 아름다워지는 중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향해야 하는 현실은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끈적거리고, 누추하기만 하다.

별과 아기 사이에 하늘과 땅 만큼의 거대한 구덩이가 있다.

그 사이에서 멀미로 쓰러지지 않으려면

역설과 아이러니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분이 그것을 즐기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새해, 새 학기, 새 묵상, 새 모임이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드러눕지 않기 위해서

동방 박사는 겸손해지길 소망한다.

별과 아기를 두루 올려다 볼 수 있도록

한없이 낮아지길 간절히 소원해본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12. 2016.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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