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인내와 체념 사이에서

창고지기들 2016. 1. 12. 17:02






인내와 체념 사이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perseverance)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perseverance)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내게 야고보서는 ‘인내의 책’이다.

첫 장과 마지막 장에 포진(布陣)되어 있는

‘인내’에 눈을 뗄 수 없는 탓이다.

첫 장에 나오는 인내(perseverance)의 사전적인 뜻은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어려움이나 장애를 극복하는

적극적이고 부단한 노력이다.

즉, 외부에서 가해지는 온갖 방해와 시험을 뚫고

기어이 목적을 가닿으려는 끊임없는 행함이 인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가 책 전체를 통해서

‘믿음의 행위’을 꾸준히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 믿음의 행위란 소망을 겸비한 사랑이다.

믿음은 사랑과 소망 없이는 온전할 수 없다.

믿음, 소망, 사랑은 완벽한 세트인 것이다.

그래서 알라카르테(a la carte)처럼

믿음을 사랑과 소망으로부터 떼어 놓고 다룬다면

변질은 각오해야만 한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목사 야고보는 퍽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교회의 덕(德)이 이원론(二元論)의 마수에 걸려들었던 까닭이다.

헬레니즘의 장자인 이원론은

무엇이든 분리하여 축소시키는데 명수였다.

명성에 걸맞게 그것은 교회에도 들이닥쳤고,

믿음을 소망을 겸비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여 축소시켰다.

즉, 믿음을 지식(도그마, 교리)으로 축소시켜,

그것을 암기하는 것이 믿음의 전형인양 속였던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진리의 목사였다.

즉, 믿음, 소망, 사랑이 따로따로 분리되거나,

축소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입으로만 떠드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진리의 목청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patient)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patient)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고보서 5:7-8)



마지막 장(5장)에 나오는 인내(patient)의 사전적인 뜻은

불쾌‧고통‧불행‧늦어짐 등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냉정히 참고 견디는 덕이다.

이것은 첫 장의 인내(perseverance)와 다르다.

첫 장의 인내가 고난을 견디면서 행하는 능력이라면,

마지막 장의 인내는 참고 견디는 인격이다.

즉, 전자가 ‘doing의 인내’라면

후자는 ‘being의 인내’인 것이다.

being의 인내가 doing의 인내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doing의 인내 없이는 being의 인내도 없다.

인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부단한 훈련(doing)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절실히 깨달은 것들 중 하나는

신앙한다는 것, 곧 소망 안에서 믿음을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인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인내해야할 것들로 인해 부쩍 괴로울 때면

그것이 DNA를 통해 유전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헛된 생각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러나 인내는 덕이요, 인격임을 아는 탓에 헛헛하게 웃을 뿐이었다.

인내는 부단한 환난 속에서 기어이 진리를 행하려는

바르고 어진 마음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내는 뼈아픈 진주다.

공짜로 얻을 수 없는 상이기에 고통의 동반은 필연이다.



어느새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다.

비자는 선교지에서 받은 환난들 중 으뜸이었다.

그것에게 마땅히 보여야할 카드가 인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인내가 아니었다.

비록 인내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는 모르나 차라리 체념에 가까웠다.

환난이 가까워 올수록 믿음과 소망을 잃은 채

사랑 없이 그저 조용히 살았던 것이다.

그분이 기뻐하실 리 만무하다.

그것은 산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척 하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열렬히 소망하고, 굳건히 믿으며,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한 때 기어이 비자를 받아 누리게 했던 나의 인내(perseverance)는

인내(patient)를 창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겉에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나,

사실은 전혀 다른 알맹이를 가진

인내보다는 체념 쪽에 가까이 서있는 것이다.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한심스럽긴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그분의 사랑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결심해본다.

인내(patient)의 사람이 되기로.



체념으로 가득 찬 모래주머니를 종아리에서 떼어본다.

인내(perseverance) 쪽으로

다만 몇 걸음이라도 걸어보기로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Jan. 11. 2016. 사진 & 글 by 이.상.예.




'그 여자의 보물창고 >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마누엘의 갈망  (0) 2016.02.01
동방박사의 소원  (0) 2016.01.22
나의 아내  (0) 2015.12.31
프레임 심판  (0) 2015.12.29
솔로몬의 잔소리  (0) 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