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그늘
#1.
몸이 졸라댔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우린 쉴 자격이 충분하다고.
결국 그의 그림자는 저수지 같이 큰 그늘에 풍덩 빠졌다.
상수리나무가 만든 것이었다.
그림자를 잃고 털썩 주저앉은 그에게 수건만한 바람이 전해졌다.
땀을 닦고 있을 때, 허기가 타전을 보내왔다.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그는 고픈 배를 어루만졌다.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한달음에 유다에서 벧엘까지 달려갔던 일이며,
우상에게 분향하던 여로보암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일이며,
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눈처럼 쏟아졌던 일이며,
여로보암의 말랐던 손을 다시 펴주었던 일이며,
여로보암의 대접을 마다하고 다른 길로 돌아왔던 일이
정말 꿈은 아니었던가?
갑자기 끈 풀린 두려움과 긴장감이
피로감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자 어둠이 온천지를 덮었다.
“당신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요?”(열왕기상 13:14)
어둠이 달아난 자리에 한 노인이 나귀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드십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여기서는 떡도 물도 안 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 가서도 안 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3:16-17)
여로보암 왕의 접대를 뿌리칠 때와는
사뭇 다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안심하시오!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라오.
여호와께서 천사를 통해 당신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떡과 물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오.”(열왕기상 13:18)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환호성을 질렀다.
배고픔과 피로감은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속아 넘어가기로 한 그는 발길을 돌려
노인을 성큼 따라가기 시작했다.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멀어질수록
여호와의 말씀도 멀어져갔다.
동시에 생명에서도 성큼 멀어지고 있었다.
거짓말쟁이와 한 끼 식사를 한 후,
그는 사자에게 물려 죽었다.
노인은 죄책감으로 울며 탄식했고,
이 사건은 북이스라엘을 뜨겁게 달군 뉴스가 되었다.
#2.
한시라도 빨리 벧엘을 벗어나는 것이 그분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곤 한다.
디프레션(Depression)을 앓는 것이다.
기침으로 시작하여 열로 발전한 뒤
해열로 마무리되는 감기처럼,
내게 그것은 우울감으로 시작하여
분노로 발전한 뒤 은혜로 수습이 되는 마음의 감기다.
“엄마, 나한테 화났어?”
하진군은 내 마음의 온도계다.
평소처럼 대해주어도 그는 내 마음의 열을
금세 알아차리고 묻는다.
“아니! 왜? 화난 거 같아?”
부정은 인정이라는 더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실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내 기본 감정은 분노일 때가 많다.
마음에 열 감기가 든 것이다.
감기의 증상들 중 하나는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외부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고 다그치고,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인생 참 어려운 노래여라’ 라고
목청을 사납게 높인다.
그러면서 나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꾐에
속아 넘어갈 준비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은혜뿐이다.
거짓말쟁이 선지자가 이르기 전에,
거짓말에 속아 길을 돌이키기 전에,
털고 일어나 그 길(The Way)을 가게 하는 것은
은혜뿐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이요,
내 십자가를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 길이 아니라,
그것을 오롯이 내가 지고 가는 길이다.
이번 마음의 감기는 향수병과 합세하여 더욱 복잡 미묘했다.
감기를 앓으면서 나는 어릴 적 ‘동네’가 그리워서
케냐에 살면서도 어김없이 한국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케냐의 상황과 사람들을 불평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침묵하시는 그분을 향한
불평불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3.
감기에 걸린 몸이 연약하시다.
열은 가실 줄을 모르고, 근육은 쑤셔대시고, 숨은 가쁘시다.
그래도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몇 걸음 벗어날 기력은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곳으로 나아가 광합성을 할 만한 힘은 있다.
연약한 자의 이기적인 완고함과
얼토당토하지 않는 비난을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
아직은 은혜를 베푸시니 말이다.
#May. 4. 2015.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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