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

거룩한 밥 짓기

창고지기들 2014. 8. 27. 20:34

 

 

 

계량컵은 정확하다.

무엇이든 은근히 고봉으로 담길라치면

볼록한 잉여분을 반드시 덜어내고야 마는 것이다.

벌써 받았어야 하는 비자를

몇 달째 냉가슴으로 기다리고 있는 나로선

확실한 그가 후련하지 않을 수 없다.

체증 같은 이민국 대신

계량컵에 쌀을 담아 흔든다.

덤으로 들어온 녀석들이 컵 밖으로 쫓겨나면,

깍듯한 한 컵의 쌀을 양푼에 쏟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량을 마친 뒤, 밥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해

애통해하는 녀석들과 그를 함께 둔다.

달래는 그로 인하여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양푼에 손을 넣는다.

쌀 속에 섞여 있는 이물질을 찾아서 제거하려는

실용적 행동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양푼에 물을 붓기 전에 하는 습관적인 동작일 뿐이다.

한 움큼 쥔 깡마른 쌀들이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쌀들이 부딪히면서 만드는 바람으로 손마디가 꽤 시원하다.

그러나 마른 쌀이 주는 청량감은 곧 휴지(休止) 된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자유연상 다발 때문이다.

그것의 지배를 받자마자 쌀을 만지작거리는 나는 사라지고,

파편적 심상들만 오롯이 난장질을 한다.

정신이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면,

얼굴과 옷에 하얀 얼룩이 적잖이 생겼을 것이다.

쌀가루가 손에 잔뜩 묻어있었던 것이다.

얼른 손을 털고 있을 때,

전도서의 한 구절이 슬그머니 다가와 빈손을 잡는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허황된 상념들이 양푼에 희끗희끗 내려앉는다.

범사에 있는 기한과 천하만사에 있는 때를 따라

손장난을 끝내야 할 때다.

 


케냐 형제들처럼 홀쭉하고 긴 쌀 알갱이들 사이에서

깨진 쌀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쪼개진 쌀을 만져본다.

탐탁하지 않다.

흠이 없이 동그란 한국 쌀이 눈에 밟힌다.

그래도 이 번 쌀에는 검불이나 돌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라며

무마하듯 수도 밸브를 돌린다.

참았던 물이 쏟아진다.

놀란 쌀들이 비명을 지르며 변하기 시작한다.

낱알을 고집하던 것들이 덩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젖은 쌀들을 손 안에 넣고 주먹을 쥐자

벌써 밥이나 된 듯 제법 주먹밥 흉내를 낸다.

양푼은 물의 응집력으로 충만하다.

그 안에서 쌀은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로 쌀을 씻는다.

아니, 물로 쌀을 씻긴다.

녀석을 비빌 때마다 허물 같은 뽀얀 물이 떠오른다.

양푼은 수차례 물을 끌어안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말간 물 일색이 된다.

세례가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시점이다.

본인의 죄가 씻겼음을 회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한 차례의 의식인 세례는 동시에 매일 쌀을 씻듯이

생활 속에서 반복하여 상기시켜야 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비록 죄 씻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해도,

인간이란 밥을 짓듯이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굴과 몸을 씻을 때마다 나는 세례를 받는다.

씻는 행위가 나의 정체성, 즉 내가 죄인이 아니라

어린 양의 정결한 신부임을 오롯이 해주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더러워진 그릇들을 닦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일회용품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스도는 더러워졌다고 냉큼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천 번이든, 만 번이든 거듭 깨끗이 닦아

새 것으로 창조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더러워졌다고 자신을 혐오할 이유가

더 이상은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나의 삶을 열 살 하진군의 발놀림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나아가 세례의 메타포는 쌀을 씻는 일에도 숨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마른 쌀 알갱이처럼 개인주의를 고집하던 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에 응집된 성도가 되었다.

덩이지는 쌀들처럼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꼭 붙어 있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씻긴 쌀들이 목욕탕에서 방금 나온 아이의 손바닥처럼 불어있다.

압력 밥솥으로 자리를 옮긴 뒤, 물을 부은 후,

뚜껑을 닫아 불을 붙인다.

한 동안 분주했던 불의 강한 손놀림이

뜸 들일 때가 되자 한 풀 꺾인다.

구수한 냄새가 부엌 밖으로 넘친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고급 브랜드의 향수 냄새가 아니라

초라한 부엌에서 지어내는 밥 냄새일 것이다.

죄인들에게 자기 몸과 피로 만든 떡과 잔을 베푸셨던 그리스도처럼,

허기진 자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즐기시던 향기도 향신료를 더한 고기 굽는 냄새,

그러니까 음식 냄새였지!)

그러나 잘 지은 밥이 되는 것은 몹시 쉽지 않다.

씻김, 불의 연단, 뜸들이기,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정이 없고,

어느 것 하나 건너 뛸 수 있는 수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생명에 관한한

그리스도께서 포기를 모르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꿈꾼다.

어느 날 내 몸에서 밥 냄새가 나기를.

궁핍한 누군가에게 구수한 생명의 양식이 되기를. 

 


불을 끄고 압력 밥솥의 김이 빠지길 기다린다.

우리 네 식구가 먹을 밥이 익어간다.

하루치의 양식이 준비되어 간다.

그렇게 우리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배고픈 누군가의 생명의 양식이 되어간다.

키리에 엘레이손!

 


#Aug. 27. 2014.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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