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운 것은 무섭다.
<광야> 다음은 <가나안>이라는 단순도식을
한 톨의 의구도 없이 받아들이다니!
학력고사식 사고는 유학생활이라는 광야를 지나
당도한 케냐를 가나안이라고 지칭했다.
낭설을 믿은 대가는 무참했다.
2년 반을 공중에 부유하며 허우적거렸으니 말이다.
발을 딛고 설 땅은 아득하기만 했다.
다른 수가 필요했다.
단순화의 오류에 빠져 침몰되던 나는 부르짖었다.
리셋의 은혜를 허락하소서!
가나안에 입주하기 전까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살았다.
광야라고 다 같은 광야는 아니었다.
에담 광야, 신 광야, 시내 광야,
바란 광야, 또 다른 신 광야를
그들은 40년 동안 지났다.
마치 미궁을 헤매듯
그들은 광야에서 나와서
광야로 광야로 광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 와중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광야의 사람이 되어야 했다.
까마득한 가나안에 목을 매었던 자들은
모조리 광야에 묻혔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4)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가복음 1:12)
한 광야에서 나와서 들어간 곳은 다른 광야였다.
다른 광야는 훨씬 더 크고 두렵게 느껴졌다.
지나온 광야가 쉬워 보일 정도로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광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광야에서
후줄근한 옷을 입고,
구멍 난 양말을 신고서
돌이 씹히는 밥을 먹으며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
내몰린 채 영적 굶주림과 두려움에 허덕이며,
물어뜯으려는 자들과 함께 사는
광야의 사람이 되는 중이다.
광야는 척박하다.
그러나 늘 메마른 것만은 아니다.
천사들의 도움으로 헐벗고 굶주리지 않으며,
들짐승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도 배우니 말이다.
그래도 위로는 필요하다.
그것이 하덕규님의 <숲>을 흥얼거리는 이유다.
숲/ 하덕규
숱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어린 날의 눈물 고인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느껴지네
어둡고 어둡던 숲
내 젊은 날의 숲
그 알 수 없던 나무
나무 사이를 끝없이 헤매이며
어두운 숲 속을 날아다니던 시절
저 파란 하늘 한 조각 보고파 울던
그 수많던 시간들을 남긴 채
광야로 광야로 광야로
저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내 젊은 날의 숲
주소를 <가나안>에서 <광야>로 바꾸자 케냐는 변했다.
흩어져 있던 만나와 음성과 훈계와 가르침이
비로소 제 공간을 찾았다.
얻고 싶었던 가나안 주민등록증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세례 요한과 주님처럼
광야의 아이디를 받았으니 손해날 것은 없다.
#Jul. 9. 2014.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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