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속주의 사회는
번듯한 기업이나 회사에 소속되려면
대학 졸업장, 각종 자격증,
각종 스코어, 각종 국내외 연수 경험 등등
이른바 스펙을 쌓으라고 강요한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필사적으로 변신하려는 삶은 피곤하다.
그래서 세속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쉼을 갈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11:28-30)
그들에게는 느긋하게 쉴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그 분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그들이 쉴 수 있도록
시간(안식일)과 공간(교회)을 마련해 두셨다.
허나, 게걸스러운 세속주의는
그 거룩한 시간과 공간마저
빠르게 세속화 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 그 분은
변함없이 고요한 목소리로
피곤한 자들을 차별 없이 부르신다.
그 분께로 가서 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스펙도 필요 없다.
그저 피곤한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면 된다.
세속적인 스펙의 사회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가!
내게로 와서 쉬라는 그 분의 부름은
그 자체로 큰 평강을 허락해 주는 복음인 것이다.
물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진 후,
그 분은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으신다.
즉, 그 분께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스펙을 쌓을 필요가 없지만,
일단 그 분께로 간 우리는
거룩한 스펙을 쌓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 분 또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 분이 인격이라는 점에서
그 분 역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실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학(神學)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일방적으로 하나님 됨을 강요당하는 것을
인격이신 그 분은 무척 답답해하실 것이다.
물론, 그 분은 그 작은 신학 안에
절대로 갇힐 수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분은 성경 안에
‘욥기’를 오롯하게 두신 것이리라.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기 12:6)
욥은 극렬한 고통을 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욥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최상급 인간이기 때문이다.
욥보다 더 온전하고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한 명만 더 있었더라도
그는 그와 같은 고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욥의 극렬한 고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거룩한 것이다.
그런 욥이 친구들을 향하여
악인의 형통함을 이야기한다.
짐승, 공중의 새, 땅 그리고 바다의 고기들도
여호와께서 악인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다.(욥기12:7-9)
물론, 이와 같은 욥의 이야기는
친구들의 신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반박하는 말로 욥을 사정없이 쏘아붙였던 것이다.
그 옛날의 욥은 친구들과 다르지 않은
신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렬한 고통을 지나면서 욥은
친구들과 다른 신학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분명히 친구들의 신학은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욥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이 와중에 정작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다.
친구들도 맞고, 욥도 맞다.
그래서 모르겠다.
그렇다고 손쉽게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분을 아는 것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끄러운 논쟁 속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자 침묵의 그림자를 길게 떨어뜨리신
그 분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림자는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원하시는 건가요?’
그 분은 이 곳 케냐에서
9개월 넘게 고통을 허락하셨다.
덕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노와 슬픔을 아프게 알게 되었다.
“나를 너희에게 주기 위해 왔는데
무시와 홀대와 조롱이라니...!”
그들이 상상하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홀대받고 핍박당했던 그 분의 상한 마음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더 이상 그 분의 이야기와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뜻만을 외치는
케냐 교회로 인하여
침묵 속에서 아파하시는 그 분의 모습으로
쓰린 속을 쓸어내린다.
‘저를 이 곳에 부르신 것은
무엇을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욥처럼 고통스러워하라고 부르신 것이로군요.
당신의 상한 마음과 아픔을 나누고자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것이로군요.’
내가 그 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간장 종지에 바다를 담겠다는 것보다
더 허황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나는 이 허황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그 분은 마리아의 품에 안기신
겸손하신 아기였던 분이기에!
#Nov. 6. 201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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