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보물창고/HIStory

선교되기

창고지기들 2012. 11. 21. 17:31

 

 

 


“엄마, 서양 애들은

동양 아이 하면 눈이 작고

옆으로 쭉 찢어져 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내가 동양 아이들 중에도

눈이 큰 아이들이 많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아.

하기야, 나도 케냐에 오기 전에는

케냐에 오면 기린이랑 손잡고

학교 다닐 줄 알았는데 뭘.”

 

 

요즘 하영양은

편견의 폐단에 점점 눈을 떠가고 있는 중이다.

하영양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편견이라는 생활 필수 아이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견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어서

편리함과 편안함(평안이 아닌!)을 주는 동시에

억울함과 아픔과 분노로 자신을 베기도 한다.

이러한 편견은 너무나 방대한 레파토리와

지독히도 교묘한 가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편견의 수많은 레파토리들 중에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끼어 있다면

너무 놀랄 일일까?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욥기 12:13-14)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 하면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단어 군을 떠올린다.

 

세움, 승리, 평화, 유익, 정의,

평탄, 존중, 부흥, 행복, 기쁨...

 

 

그런데 욥은 그와 같은 단어 군을

모조리 지운 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전혀 다른 단어 군과 연결시킨다.

 

추락, 무너짐, 패배, 굴욕, 어리석게 됨,

폭로, 조롱, 비웃음, 비틀거림...

(욥기12:14-25)

 

 

그러니까 욥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편견으로 분류한 뒤,

그 편견을 거칠게 깨버렸던 것이다.

 

욥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들은 고통이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생각을 욥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시켰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던 욥은 친구들에 의해서

위로가 아닌 정죄를 당했다.

 

그러나 욥은 경험을 통해서

고통이 지은 죄에 의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통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악인의 형통함을 이야기한 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한

그들의 편향된 견해(편견)을

정반대의 시각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욥은 훌륭한 교사다!)

 

 

욥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은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패망케 하고,

굴욕을 당하게 하며,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욥 자신이 바로 그 증거다.

 

그렇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파괴되고, 무너지고, 망하고,

굴욕과 조롱과 비웃음이 난무하는 곳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은 서려있다고 말이다.

폐허 속에서도 그 분의 지혜와 권능은

서늘하게 드리워져 있다고 말이다.

욥의 고통처럼 말이다.

 

 

 

케냐의 한 교회의 성찬식에

처음 참여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는 멤버들 중

여성들이 심심찮게 끼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공 예배 때

대표기도와 찬양 인도,

사회와 설교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분병과 분잔에도 참여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으로 불편하게 다가왔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케냐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사회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큼은 말씀대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내게는 참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는 나의 신학적 배경의 한계,

나의 목회적 경험의 한계,

즉, 나의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흔들렸다.

 

‘누가 누구를 선교한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나를 ‘케냐 선교사’로 부른다.

케냐에서 선교를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이 호칭은 맞기도 하지만,

동시에 틀리기도 하다.

왜냐하면 선교사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선교사에게는 기본적인 편견이 존재한다.

선교사는 선교의 주어이자 주체이며,

도움을 주는 자이자, 유식한 자이고,

선교 대상자는 선교의 목적어이자 타자이며,

도움을 받는 자이자, 무식한 자라는 편견 말이다.

 

 

하지만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철저히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어이자 주체이며,

하나님만이 도움을 주는 자이자,

지혜로운 분이시고,

인간은 선교의 대상일 뿐이다.

이 때 선교사도 예외는 아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특별히 부름을 받은 자이나,

그 역시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인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케냐 선교사로 불리는 나는

케냐에서 선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 위하여

케냐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통해 케냐를 선교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케냐 안에서 나를 선교하신다.

 

분명히 케냐는

불안정하고, 불의가 가득하며,

테러와 폭동의 위험으로 늘 불안하며,

극심한 빈부의 차이와 허술한 국가 경영으로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곳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서려있다.

 

케냐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무너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냐 교회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서늘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케냐에는

멋진 귀고리를 한 아가씨가

도로 공사를 위해서 열심히 삽질을 하며,

여성 경찰관들이 손가락 하나로

거리의 차들을 좌지우지 하고,

여성 군인들은 총을 들고 활보하는가 하면,

여성 경비원들이 컴파운드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케냐 교회에는

알록달록 멋스러운 옷을 입은 여성들이

말씀으로, 기도로, 찬양으로, 분병과 분잔으로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다.

 

그렇게 그 분은

나로 그들을 지켜보게 하시면서

나의 편견을 조금씩 허물고 계신다.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은

당황스럽고 아픈 일이나,

하나님의 선교의 첫 걸음은

인간의 편견을 깨시는 것이니

깨시고, 부수고, 무너뜨리시는

그 분의 지혜와 권능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굴복하여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나는 오늘도 케냐의 선교사로서

그 분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지금도 케냐의 선교사로서

케냐에서 선교 되고 있는 중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Nov. 21. 2012. 사진 &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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