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 브살렐
딱 걸리듯 그녀를 만난 곳은 분당의 어느 거리였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숨기 바빴는데,
꼼짝 없이 직면하게 되어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면(對面)이란 얼마나 단도직입적인지,
우연한 만남이었음에도 일감은 그 자리에서 즉시로 내게 떨어졌다.
그렇게 될 줄 알고 피해 다녔던 거였는데,
적중한 나의 직감이 탐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떠넘겨진 일거리를 19년째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
세월을 따라 그것은 어느새
삶에 의미를 덧입혀 주는 사명이자 선물이 되었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19년째 근속하고 있는 일은
초등학교 4-6학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묵상집의 원고를 집필하는 것이다.
어린이 묵상집의 원고 집필은 창작적인 측면이 없진 않으나,
그 보다는 기술적인 측면이 훨씬 우세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사실상
창작자의 일이라기보다는 기술자의 일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성소에서 섬길 때 입을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출애굽기 39:1)
그들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있는 자들,
곧 가진 기술을 연마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주문대로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 뜻과 비전을 따라 창조하는 창작자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즉,
여호와의 뜻과 비전을 따라 그것을 정확하게 형상화시키는 기술자들이다.
모세는 특별히 제사장의 옷을 짓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일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여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만들었)더라
(출애굽기 39:1, 5, 7, 21, 26, 29, 31)
문득, 브살렐과 기술자들의 일에 대한
모세의 반복적인 표현들이 내게로 몰려와서 부딪힌다.
여호와께서 편집자에게 명령하신 대로 집필자들이 집필하였더라
말하자면, 나는 묵상 원고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기능을 가진 기술자다.
지금까지 집필해 왔던 묵상 원고들은 편집자나
편집 방향이 바뀔 때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포맷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군말 없이 맞춤 집필을 해왔다.
본문 읽기에 중점을 두는 포맷, 본문의 해석과 설명에 중점을 두는 포맷,
그리고 적용과 기도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포맷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편집자의 주문대로 원고를 집필해온 나다.
물론, 하루아침에 바뀐 포맷에 맞추어 집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원고 집필에도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기에,
새로운 형식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절하는 일은 짜증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는 대신에
집필자들 전부를 향해 보내온 원고에 대한 이러저러한 지적은 듣기 힘들다.
나와 같은 A형인 집필자들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하고 과도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집필 기간이나 분량이 느닷없이 바뀌어 배당될 때는
부당하다고 느껴져 ‘그만 둘까?’ 하는 고민도 여러 번 해봤다.
(저런, 쓰고 보니 19년간 어디에서도 해보지 못한 성토를 하고 있군, 나는.ㅋㅋ)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오롯이 해주는 고마운 고비들이다.
어려운 국면들을 그럭저럭 넘겨가면서
어느새 나는 어린이 묵상집 원고 집필이 창작자의 일이 아니라
기술자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얼추 기술자가 되었다.
편집부의 그 어떤 주문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짜증내지 않는다.
그들 편집자들이 정한 묵상집의 방향을 따라
내게 맡겨진 분량을 기간 내에 묵묵히 완성할 뿐이다.
그것도 매우 성실히 하여,
대개 마감 일주일 전에 원고를 넘기면서.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나는 사부를 만났다.
성막 건축의 총 책임자인 브살렐이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한(출애굽기 35:31) 최고 기술자다.
그를 내 맘대로 사부로 임명하고 보니,
나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추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해진다.
그래서 묵상 원고를 쓸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겠다.
주여,
당신의 지혜와 총명으로
저의 언어를 영감하소서.
당신의 어린 제사장들이 입을
말씀의 옷을 아름답게 짓게 하소서.
말씀으로 지은 옷을 입고
거룩한 자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축복을
그들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Aug. 5. 2021. 글 by 이.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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