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스캇 펙의 책, <끝나지 않은 여행>을 읽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49-50)
살아가면서 늘어가는 것은
나이나 주름살만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다면,
멋진 가족 구성원이 하나씩 늘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의 할아버지 폴 투르니에,
나의 담임 목사님 유진 피터슨,
나의 선배 월터 부르그만처럼.
그러다 이번에는 생면부지의 오빠가 생겨버렸다.
<거짓의 사람들>, <아직도 가야할 길>에 이은
<끝나지 않은 여행>을 거치면서
결국 나는 스캇 펙을 나의 오빠로 임명했다.ㅋ
일전에 읽었던 오라버니의 전작들에 비해
이 번 책 <끝나지 않은 여행>은 조금 가벼운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신의학자로서 정신의학에 대한
애정과 진심어린 염려가 듬뿍 묻어있는 책이었다.
즉, 종교(초월성 담당)와
과학(내재성 담당)의 이혼(분리)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인간의 전인격적 치유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정신의학(과학)이 간과해왔던 영성(종교성)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오라버니 자신의 사적인 회심의 과정을
솔직하게 파편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그는 선불교의 징검다리를 사뿐히 즈려밟고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하나님은
신학적 교리나 교조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런 오라버니의 모습을 두고
누군가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큰 소리로 비난도 하겠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피식 웃고 넘길 오라버니다.
이 책을 새롭게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오라버니의 회심 시점이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직후라는 것이다.
사실,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있었을 때,
나는 그의 회심이 이미 성사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책은 회심의 여정 중에 쓰인 것이었다!
암튼, 회심 이후로 오라버니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히 소개한다.
이는 세상이 그리스인에게 가지고 있는
극단적 판단과 과도한 비난 까지도
오라버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에,
비난을 받아도 억울해 하는 법이 없는 그다.
그런 오라버니에게 나는 우스갯소리를 건넨다.
“초신자 주제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성숙해도 되는 거야?”
오라버니에게 인생은 대단히 복잡한 것이나,
동시에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그 복잡한 인생이란 것이
연속적인 배움의 과정으로 단순 요약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때 배움이란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 중에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련의 환난과 고통과 아픔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영적 성숙의 실현을 위한
배움의 한 과정일 뿐이다.
그것들이 몰려올 때 도망치거나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등의 방식으로 회피하면,
배워야 할 것을 제 때 배우지 못해
성장이 멈춰버리게 된다.
성장을 멈춘 생명이 건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그것은 이미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가깝다.
각종 심리적·정신적인 질병은 잡초처럼 자라나
그의 정신과 영혼을 덮쳐 심히 괴롭힌다.
질병의 핍박은
생명이 성장을 선택하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라버니는 정신의학자들이 환자 치료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신앙(영성) 발달에 대한
일반적인 4단계를 소개한다.
1단계는 혼돈과 반사회적 단계로
영성이 없는 무법의 단계다.
2단계는 공식적 제도적 단계로
종교의 교리와 형식에 집착하는 단계이며,
3단계는 회의적 개인주의적 단계로
원칙 있게 행동하는 동시에 삶의 다른 영역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나 종교적으로는 회의적이거나
무관심한 특징을 보인다
(정신의학자들은 대부분 이 단계에 속한다고 한다).
마지막 4단계는 신비적 공동체적 단계로
가장 성숙한 단계다.
종교의 형식과 교리에 집착하는 2단계와는 달리
자유롭게 종교의 형식과 교리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단계다.
이러한 명확한 분류 앞에서 해봄직한 일을
독자로서, 동생으로서 나 역시 물론 해봤다.
그렇다면 나는 몇 단계에 속할까?
야박하게 평가해도 2단계는 벗어난 것 같고,
후하게 저울질 해봐도 완벽한 4단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3단계라고 하기에도 그런 것이,
종교적으로 회의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너무 대충 나눈 거 아니냐고
오라버니에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이것은 정신의학자들을 위한
대강의 분류일 뿐이지,
너 같은 골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었다.
그러면서 오라버니는 전작이었던
<아직도 가야할 길>의 약점에 대해 솔직히 고백했다.
먼저, 그는 인생의 여정을 실제 모습보다
더 선명해 보이는 공식처럼 만든 것은
명백히 잘못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그럴듯한
자신의 입심에 자신도 퍽 당황했으며
(사실, 나는 그의 입심이 특히 마음에 든다!ㅋ),
실제로 저 밖에 존재하는 온갖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고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반성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를 더욱 성장시켰을 것이다.
나는 그런 오라버니가 퍽 마음에 든다.
이 책에서 특별히 재밌었던 부분은
정신의학자로의 오라버니만의
특별한 성경 해석과 신학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대한 해석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지적인 측면에서 가장 좋은 해석은
‘혼란스럽다’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혼란이야말로 해명을 필요로 하고
이 혼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줄 것이다. …
스스로 혼란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본서 중에서
2. 지옥에 대한 신학적 견해
지옥에 대한 내 생각은 확실히 루이스와 같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 나올 수 있다.
이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나 또한 전통 기독교와 다른 면이 많이 있다.
신께서 희망도 갖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벌주고,
부활의 기회도 없이 영혼을 파괴하는 곳이
지옥이라는 견해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끓는 기름에 사람을 튀겨버릴 심사였다면
신은 일부러 그토록 복잡하게
영혼을 창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서 중에서
3. 예수께서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쳐주신 기사에 대한 묵상 포인트
청중들에게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했냐는 질문을 했던
하비 콕스를 소개한 후, 600명의 청중들 중
혈루증 앓던 여인이 100명 정도,
죽어가는 딸을 걱정하던 로마 관리가 상당수,
지켜보던 군중이 대부분,
그리고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 한 사람은
단 여섯 명이라고 설명한 직후 오라버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오만해 보인다면
우리의 기독교 개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하고
예수처럼 행동해야 하고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가 해야 할 일,
즉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본서 중에서
4. 제 2 십계명에 대한 해석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는 너의 하느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는
부정한 말로 하느님을 욕되게 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불경은 정반대를 의미한다.
즉, 불경이란 달콤하고 종교적인 언어를 이용한
비종교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본서 중에서
5. 공동체와 사이비의 명쾌한 구분법
공동체는 입출입이 자유롭고 개성,
다양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자랑스러워한다.
반면, 사이비는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가는 것은 어림없는 짓이고,
구성원을 세뇌하여 개성을 말살하고 획일화시킨다.
6. 이단에 대한 견해
이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합적인 사고란 역설적인 사고를 말한다.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통합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통합적인 행위란 ‘실천’을 말한다. …
실천이란 행위와 신념 체계를 통합하는 것이다. …
우리는 분명하게 행동과
신학을 통합해서 완전한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어떤 종교적인 신앙을 가졌든
이런 일이 자주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고의 역설의 한 단면에
동조할 때 많은 이단이 생긴다.
이단은 잘해야 절반의 진실이고
근본적으로는 거짓말이다.
-본서 중에서
7. 개혁이 어려운 이유에 대한 견해
완전함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늘 고통스럽다.
완전함을 지향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완전함을 이루기란 늘 고통스럽기 때문에
개혁이 혁명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본서 중에서
오라버니는 책을 통해
내게 숙제 하나를 내밀었다.
그가 책에서 인용했던 학자들,
즉 프로이트, 피아제, 에릭슨,
콜버그, 파울러 같은 이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융은 예외였다.
융은 오라버니가
특별히 좋아라 하는 학자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실, 융을 전혀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들을 통해
융을 심심찮게 접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본격적으로 배워봤다거나,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으로 그것이 선호했던
프로이트만 추켜세우면서 가르쳤던
한국의 교육 현실이 가장 큰 이유였을 테다.
그리하여 나는 오라버니의 권유를 따라
융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었고,
벌써 두 권의 책을 구입해놓았다.ㅎ~
오라버니는 서문에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그것을 대강 요약하면 이렇다.
‘살면서 필요하다면 우리보다 더 위대하다고
인정되는 어떤 힘에 도움을 청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과학이라는 것도 세속적 인문주의라는
일종의 종교일 뿐이니까.
또한 생을 너무 단순화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생은 원래 복잡한 것이니,
매사를 단순화시켜 쉬운 공식이나
빠른 해결책을 찾으려는
충동에서 벗어나 다면적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의 신비로움과 역설에 놀라고,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기를 소원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오라버니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나 역시 소원하게 되었다.
인생의 복잡함과 다면성을 수용하면서
선물로 주신 인생의 신비로움과 역설에 경이와 찬탄,
그리고 감사를 끊임없이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된 것이다.
결코 초라할 수 없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께!
내가 기독교인이 된 이유는 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기독교 교리가 신의 실재와 가장 가깝고
다른 어떤 위대한 종교보다 보편적인 실재에
훨씬 더 근접해 있다고 점차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배워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고
가능한 한 다른 종교의 지혜를 많이 축적해두는 것이야말로
교육받은 기독교인의 의무다.
기독교 교회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아마도 오만함과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이러한 오명 때문에 기독교인은
신을 꿰어다 자기 뒷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모든 진리를 장악하고 있어서
이 진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과 다른 것을 믿는 불쌍한 얼간이들은
반드시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생각에 아주 초라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신학보다
하느님이 더 위대하는 진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미 말했듯이, 신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분의 소유다.
기독교의 이러한 편협한 나르시시즘은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된다. -
본서 중에서
#Feb. 22. 2021. 글 by 이.상.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