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책, <마음 사전>을 읽고.
마음의 경영이 이 생의 목표라는 저자다.
그녀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마음을 계획적으로
관리(유지, 보수, 개선, 통제, 감독)하고 운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규모를 정하고 기초를 닦아
마음의 집을 세우는 것인지,
즉 마음의 경영이 소프트웨어를 말하는 것인지,
하드웨어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를 아우르는 것인지는
책을 읽어봐야 알 일이다.
어쩌다 그 일을 나는 했고,
후자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유명한 독일 출신 철학자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다.
기독교 전통은 존재,
그러니까 인격의 중심을 마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언어가 마음의 집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다.
그래서 일까?
저자는 마음과 관련된 언어들을 근면히 골라낸다.
이는 마음의 규모를 정하는 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심장을 지나고 있는
온갖 종류의 핏줄들, 그 엇비슷한 언어들 간의 미세한 차이를
기막히게 구별하여 기초를 닦는다.
그렇게 저자는 마음의 집을 세우는 건축가이자,
마음의 집을 위한 건축 자재를 공급하는 자재상이다.
마음에 대한 즐거운 억측을 시작하며 –본서 중에서
책 속에 담긴 마음의 자재(언어)들은
저자가 손수 고르고, 재단하고, 편집한 것들이다.
이 작업을 두고 저자는 ‘억측’이라고 표현했다.
근거 없이 제멋대로 추측한 것이라는 말은
지나친 겸양이다.
대부분(전부는 아니지만)의 작업들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 동의하고 재청할 만큼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성경을 묵상하는 일이 업이 되어 버린
내게도 마음은 중요한 존재다.
게다가 묵상하는 자의 일상은
마음을 경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마음의 집을 세우는 일인 동시에,
마음을 관리하는 일을 모두 아우른다.
물론, 묵상가의 마음 경영은 후자 쪽이 훨씬 강하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소중하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게
당신과 나의 소망이었다. …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본서 중에서
나의 로고스씨는 중요하기보다 소중하다.
그래서 그와의 약속 또한 소중한 쪽이다.
이것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약속대로 묵상(만남)을 하는 까닭이다.
반면, 내게 구원은 소중하기보다는 중요하다.
구원과 관련하여 내게 소중한 것은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자다.
구원은 구원자를 만나는 방법일 뿐이다.
그리하여 어쨌든 나는
소중한 것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한다.
구원자 로고스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면서 친밀히 사귄다.
이 중요한 일을 통해
소중한 분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방출이 정상적인 출구를 사용하는 내보내기라면,
분출은 예정되지 않은 곳에서 함부로 터져 나오는 내보내기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는 일종의 ‘심술’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지나친 억제를 받으면, 불쾌한 출구를 통해
그것을 발산하고자 하는 괴팍함이 있다.
-본서 중에서
꾸준히 억제를 당하며 살아온 생의 이력은
종종 억제하는 장금 장치를 닳아빠지게 한다.
이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자들이
틀린 상대를 향해 심술을 분출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분출들은 일종의 쾌감도 느끼게 할 것인데,
그래서 쉬이 중독도 되는 것이겠다.
그 결과 심술궂은 늙은이가 탄생된다.
틀린 상대를 향하여 감정을 분출하는 것을 가리켜
미성숙이라고 한다.
성숙한 사람은 올바른 상대에게
건전한 방식으로 감정을 방출한다.
그러니까 심술궂은 늙은이는
꽤나 미성숙한 종류인 것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되도 않는 심술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부리고 싶다고 다 부린 것은 아니지만,
참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나에게 등기우편으로 배달되는 것은
수치스럽게도 취학통지서다.
혀를 끌끌 차면서,
나를 학교로 거듭 보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심술이라는 것이 죄인들에게
선천적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능숙한 해커가 되어
심술을 거듭 해킹하여 망가뜨리는 것이야 말로
늙어가는 자의 숭고한 인간다움일 테다.ㅋ
자존심은 차곡차곡 받은 상처들을,
자존감은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한다.
-본서 중에서
사실, 차곡차곡 받은 애정들을
밑천으로 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존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감이다.
자존감은 애정을 밑천으로 자기애를 불려
이타심(타인중심)을 갖게 한다.
반면, 자신감은 애정을 밑천으로
이기심을 불려 자존심(자기중심)을 부리게 한다.
이 과정에서 자존감은 용기랑 용서와 제휴를 하고,
자신감은 만용이랑 비난과 제휴를 한다.
용기란 두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 하는 능력이며,
용서란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
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상대방의 죄를 사하는 것이다.
반면, 만용이란 터무니없는 자신감만 믿고
일을 저지르는 행동이며,
비난은 악을 피하려고 하다가
악의 제물이 되어 자신을 분노로 활활 태워
상대방의 허물을 헤집어 저주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선은
나의 식은 사랑과
당신의 식지 않은 사랑의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필요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위악은
나의 식지 않은 사랑과
당신의 식은 사랑을 견뎌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본서 중에서
그래서 구약의 당신은 우리에게 위악을 떨고,
신약의 우리는 당신에게 위선을 떠는 것이군요.
식을 줄 모르는 당신의 사랑과
쉬이 식어버리는 우리의 사랑의 온도 차이로 인하여!
맙소사!
책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레 상상되었던 저자의 이미지가 있다.
무균실험실에서 고글을 쓰고 핀셋을 들어
제멋대로 뭉뚱그린 언어 덩어리를 하나하나 떼어
분리하는 편집증을 앓고 있는 언어 실험자.
무안함이나 창피함은 ‘당하는 것’이지만,
부끄러움은 ‘타는 것’(그래서 부끄러움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인간성의 진보를 성취하는 것이로군!)이라는
실험의 결과를 발표함으로써 나를 피식 웃게 만들었던,
괴짜 실험가.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자.
그렇게 저자는 깐깐하고 세밀하고 예민한 언어의 세공사다.
그래서 작가 본인은 억측이라고 주장해도,
독자는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책을 덮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목표란 모름지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
그렇다면 저자는 마음 경영이라는 목표를 통해서
과연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 것일까?
#Feb. 2. 2021. 사진 & 글 by 이.상.예.